오늘의 본문 (쉬운 성경)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지도자들
45 <유대 지도자들의 불신앙> 성전 경비대가 예수님을 잡지 못한 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돌아오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그를 데려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46 성전 경비대가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47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성전 경비대에게 되물었습니다. “너희도 미혹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48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 중에 그를 믿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다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군중이나 그를 믿는데, 그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50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전에 예수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51 “우리의 율법에 따르면,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지 않거나 그가 행한 것을 알아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52 다른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그러면 당신도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오.”
53 이 말을 하고는 그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교만하여 완악한 자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습니다(요 7:32).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종교 지도자들은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아랫사람들이 율법을 모르기에 미혹되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은 아랫사람들을 저주하고 깎아내립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건 본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지식이 아랫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우월감에 빠진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수록 겸손하고, 인내함으로 다른 성도를 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한 우월감에 빠진 적이 있다면 언제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어긴 자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전한 말씀을 듣지도, 행한 일을 확인하지도 않고 심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공정히 판결해야 했습니다(신 1:16-17).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따라서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모른다며 아랫사람들에게 저주까지 퍼부은 자들이 율법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삶으로 살아 내지 못하고 전하는 말씀은 결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말씀의 교훈을 전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타인을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한 적은 언제입니까?
나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어느 샌가 한국 사회 안에 자리 잡은 신조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지만,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단어입니다. 바로 ‘갑질’입니다. 갑질이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꼭 경제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낮은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아는 자들이었고, 율법의 일점일획까지도 지키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담고 있는 사랑의 정신은 버렸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율법은 기득권이었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진 않은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첫째, 말씀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앞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고, 부릴 수 있는 아랫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는지’ 물었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46절,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상 그 어떤 교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선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말씀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역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진정한 가르침과 교훈을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도 이러한 모습이 있진 않습니까? 교회에 오래 다녔고, 말씀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직분도 받았고, 직무도 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흘러간 곳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자들도 궁궐에 있는 자들이 아닌, 밤새 양 떼를 돌보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교만을 버리십시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둘째, 앎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아랫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그 책망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합니다. 49절,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아랫사람들이 율법을 모르기에 저주받은 자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 율법을 모르는 자가 누구입니까? 구약의 율법은 우리의 그 어떤 행실로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수많은 제사를 드리고, 수없이 많은 제물을 바쳐도 우리 안에 있는 죄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시야! 구원자가 오실 것을 수없이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 앞에 약속된 메시야가 계심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율법을 알지 못한 것은 아랫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율법을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아이 좀 봐줘. 잠깐 나갔다 올게” 그래서 남편은 멀찍이 서서 아이를 1시간 내내 지켜봅니다.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하는 데도 아내의 말대로 지켜보기만 했던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예시 같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글자로만 알뿐 삶에 그 어떤 적용도 없다면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앎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낮은 자에게 흘러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낮음은 신분의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말씀의 권위 앞에 겸손히 낮아지는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랫사람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책망했지만, 그 율법의 교훈을 버렸던 것은 자신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편지는 전해져야 하고, 향기는 퍼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그 누구보다 높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사랑하며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낮은 나를 살리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말씀을 아는 만큼 삶으로 살아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한국교회와 함께 큐티를 보다 https://youtu.be/snXhpnKTn_o?si=5ehR4Nl7NDHs5ILO
(오늘 본문 요약)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일부 무리들은 물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파송받은 군인들까지도 받아들이자, 기득권층에서 거세게 반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아랫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와 그 말씀의 권위를 증거하자, 더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예수를 좇는 무리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며 저주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옹호하지는 못했지만 바리새인들의 편협한 판단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예수를 옹호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은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며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깨우침)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율법을 근거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보지 않고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용기 있게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한 하나님의 말씀을 편협되고 그릇되게 해석한 것을 근거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자신들을 방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지역적 편견에 갇혀 하나님의 전체 역사를 보지 그릇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니고데모의 변호는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성도는 어느 자리에서나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는 자들 앞에서 바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서 바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갇혀 예수님을 아예 믿을 생각을 하지 않은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고, 제한적인 생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때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그리스도의 향기이기에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나타내며, 나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변함없는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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