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 (쉬운 성경)
양의 우리 비유
1 <목자와 양>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다.
2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양의 목자다.
3 문을 지키는 사람은 목자를 위해 문을 열어 준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4 목자가 자기 양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후, 양들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른다.
5 하지만 양들은 낯선 사람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양들은 낯선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멀리 도망간다.”
6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이 자기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분별의 기준이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당시에 유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양의 우리에 비유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목자는 보통 강도나 맹수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치고 문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문지기를 세워 그 문을 지키게 합니다. 목자는 문지기가 있는 문을 통해 정식으로 우리에 들어가지만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양들에게 접근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양에게 다가가는 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가 아닙니다. 영적인 꼴을 성도에게 먹이는 목회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만나
이단이나 삯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둔 목회자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
예수님은 양의 목자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양 전체를 이끌면서 양 한 마리마다 각각의 이름을 붙여 불러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또한 부르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한편, 양은 시력이 좋지 못한 대신 청력이 좋아 목자의 외모를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오직 목자의 소리를 따라서 이동합니다. 우리 역시 양과 같아야 합니다. 나를 유혹하는 수많은 소리가 있지만 나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아시고 부르신다는 것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주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소리를 경청한 적은 언제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오늘의 본문 말씀은 앞에 있는 9장 말씀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드러낸 이 기적 앞에 바리새인들은 크게 분노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를 출교 시키기로 결의합니다. 그리고 그 맹인의 부모에게 묻자 그들은 두려워 대답을 회피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진짜 맹인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10장 말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어떠한 자인지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양을 훔치는 강도에 비유하십니다. 이때 당시 양의 우리는 지붕이 없이, 돌이나 진흙 벽돌로 쌓아 올려 굉장히 허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을 목자가 지키고 있지만, 문을 통하지 않고도 담을 넘어 충분히 양을 훔칠 수 있었습니다.
존 칼빈은 이 양의 우리를 신약시대의 교회로, 마틴 루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행위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성도들을 무너뜨리는 절도와 강도로 여긴 것입니다. 우선, 절도는 헬라어로 [클레프테스]입니다. 이 단어는 남의 소유를 은밀하게 빼앗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다음으로, 강도는 헬라어 [레스테스]로 폭력으로 남의 것을 강탈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복음 18장에서 폭동과 살인죄로 기소되었다고 예수님 대신 석방된 바라바에게 쓰였습니다. 따라서 절도와 강도라는 두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은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은밀히 그리고 강압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주의 백성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바리새인은 2세기경 엄격한 율법주의적 신앙 공동체 ‘하시딤’이 마카비 혁명 기간 동안 수리아의 헬라화 정책에 대항하며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수리아의 정책에 반대하며 선민으로 거룩하게 살자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 누구보다도 진리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이스라엘의 리딩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가 아닌 자리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로 여기는 독단에 빠졌습니다.
또한, 율법의 문자적 실천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고 백성들을 정죄하였습니다. 행위에 매몰된 그들은 정작 자신들은 유전을 내세워 율법 준수마저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라는 자리는 얻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잃었습니다. 자리에 집착하여 진리를 잃은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절도요! 강도다!] 한때 진리를 가장 앞자리에서 수호했던 바리새인들이 결국 진리를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을 도전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자리에 집착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진리에 집중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조건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를 구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용해 내가 원하는 조건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통해 내가 얻을 부가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인생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혹시, 나만 옳다는 아집과 독단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보다 신앙이 연약한 자를 정죄하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 못한 채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이 영상을 시청하는 저와 여러분이 자리가 아닌 진리에 집중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오늘 큐티 말씀을 통해 진리에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자리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에 집중하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한국교회와 함께 큐티를 보다 https://youtu.be/fLBxqOmZNog?si=_qBSXWQ1HWJSd2Qw
(오늘 본문 요약)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며 자신의 구속 사역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심은 참 목자이신 자신과 하나님 백성과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인도합니다. 양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지만 다른 사람은 그 음성이 다르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깨우침)
우리의 참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양 떼인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 앞서 행하십니다. 신명기 1장 33절 말씀에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행하셨음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도 그를 따르는 양 떼들보다 앞서 행하십니다. 그 양 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 행함으로 그릇된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향해 나의 눈을 고정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주님을 따라 인생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시어, 양들이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게 하셔서 주님의 음성과 악한 영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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