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나 아침 묵상/신약4. 요한복음 묵상노트(완료)

요한복음 9장 13 – 23 주님을 제한하지 말라

smile 주 2024. 5. 12. 06:01

오늘의 본문 (쉬운 성경)

 

시각 장애인과 바리새인들

13 <완고한 바리새인들> 사람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14 예수님께서 진흙을 만들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준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15 바리새인들은 다시 그 남자에게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진흙을 내 눈에 발랐습니다. 내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16 바리새인 중에는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사이에 편이 갈렸습니다.

17 바리새인들은 그 남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18 유대인들은 그 남자가 전에는 앞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남자의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았습니다.

19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 맞습니까? 당신들은 그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가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습니까?”

20 그의 부모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우리 아들인 것을 알겠고, 또 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아이였다는 것도 알겠는데,

21 그 애가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는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대답을 할 만큼 나이도 먹었으니,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22 그의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23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가 그가 나이를 먹었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주만나 큐티)

 

하나님을 내 틀에 가두지 말라

안식일에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이가 이웃의 손에 이끌려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행한 이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 이러한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이 특별한 분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기적을 두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율법의 전통적 해석의 틀에 갇힌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치유 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내 경험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예수님을 믿지 않던 이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잘못된 틀은 무엇입니까?

내 해석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난 때문에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눈을 고침 받은 이에게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냐고 심문합니다. 고침받은 이는 예수님이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를 불러 아들이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 재차 물었습니다. 부모는 직접적인 답을 회피하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를 당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경험하고도 고난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성도는 고난이 예상되어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예수님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난이 와도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큐티를 보다 영상강해)

 

사람마다 관점이 다릅니다. 같은 사건이나 현상을 두고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컵에 물이 반만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컵과 똑같은 양의 물을 보고도 부정적인 반응과 긍정적인 반응으로 나뉘는 것이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과 관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해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고 같은 말씀으로 큐티를 해도 그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대하는지에 따라 신앙의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본문에서도 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셨는데 그날이 하필이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의 현장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의 반응도 달랐는데요, 이를 통해 두 가지 메시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내 생각과 경험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치시자 유대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놀라운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기적의 현상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침 받은 사람을 당대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어요. 그러자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바리새인 중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했어도 안식일에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바리새인은 죄인이 어떻게 이렇게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예수님을 옹호했어요.

 

이들은 같은 신앙의 노선에 있었음에도 예수님의 기적을 두고 다른 관점을 가졌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대해 잘못된 해석의 틀에 매여 있던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얄팍한 신학적 지식으로 신학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내 지식과 신앙적 경험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경험과 생각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신 분임을 인정하고 신앙의 지경을 넓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고난 때문에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고침 받은 사람을 불러놓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고침 받은 사람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몰랐지만 예수님이 선지자인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잘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틀림없다고 말한 것이죠.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그의 부모를 불러서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모는 그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맞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보게 된 것이고 누가 고쳐준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어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실을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22절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그 부모는 자식이 고침을 받았는데도 사실을 말하면 출교를 당할까 봐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숨기지 않았어요. 그로 인해 앞으로 고난을 받을지언정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주님을 부끄러워해선 안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죠.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온갖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고난 앞에서도 주님을 당당하게 드러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나의 생각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기 원합니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더욱 경험하게 하시고 신앙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결단합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몸 버리신 예수님을 더욱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한국교회와 함께 큐티를 보다  https://youtu.be/bLBM61dOB_A?si=4pp-IO5u2x0PV6Cz

 

 

(오늘 본문 요약)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치료해 준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이었던 자를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먼 사람이었던 자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눈에 진흙을 발라주어서 그것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 중에 어떤 이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하고, 어떤 이는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고 하며 서로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들은 다시 그의 부모를 불러서 이 사람이 아들이 맞는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였었는지를 묻고,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심문합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자기들의 아들인 것과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였다는 것은 맞지만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깨우침)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따졌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 맞추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안식일에 행하신 것을 문제 삼아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된 목적은 잊어버리고 형식에 매여 본질을 잃어버린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영적 무지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거룩한 선행을 의미 없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형식에 치우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생명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의미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신앙의 길에서 혼란에 빠졌을 때, 욕심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게 하시고, 바른 지혜를 주셔서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어,  내가 주님을 믿는 백성임을 세상에서 당당히 고백하고 밝히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대로 보냄을 받은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