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다니엘 기도회 간증

하나님 나라 (이사야11:1-10) - 김인강교수 (11월 2일)

smile 주 2023. 11. 29. 09:00

 

□ 두 살 때 얻은 장애로 초등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 저는 시골 외딴 마을에서 태어나 2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대신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저녁이면 동산에 걸린 달을 보며 몽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저 산 너머 마을에는 누가 살까 저 바다 너머에는 어떤 나라가 있을까 붉게 노을 진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인생도 저렇게 서글프게 지는 석양처럼 어쩌면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겠구나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저에게 친구라곤 병아리들과 지천으로 핀 들꽃과 따뜻한 봄볕과 아지랑이밖에 없었던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은 어떻게 견디는지,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혼자 배워 나갔습니다.   

- 장애로 인해 초등 교육을 받지 못한 저는 11살 때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는 누나의 권유로 재활원에 입소하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세상의 그늘에서 소리 없이 신음하는 인간들의 삶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10살부터 30살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장애로 인하여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 부모마저 감당할 수 없어 그곳에 고아로 버려진 많은 아이들을 보며 더 이상 무슨 고통을 더 그들에게 주어야 이 세상은 속죄할 수 있을까 하고 혼자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 어린 나이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저는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흰 영구차에 실려 가는 작은 친구들의 시체를 보는 날이면 저는 강가 둑방에 누워 하루 종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후에 언젠가 제가 까뮈의 책에서 읽었던 그 분노를 저는 그때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을 부정하지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고통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 하나님 나라는 그분이 통치하는 곳입니다. 

  

-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10대를 거쳐 저는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서야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는 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셨고, 그 뒤로 저는 그분이 저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저에게 닥치는 모든 개인적인, 시대적인 아픔을 뛰어넘는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예수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시고, 저의 마음속에, 영혼 속에 심어준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로 인한 세상의 완벽한 회복과 피조물 간의 조화로운 삶,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하나 됨을 보여주는, 성경에서 가장 희망에 찬 본문 중 하나입니다. 제가 조사해 봤더니 구약 성경에 히브리어로 ‘나라’는 ‘말쿠스’입니다. 기록된 하나님 나라는 주로 통치, 지배, 왕권과 같은 용어로 쓰였다고 합니다.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를 ‘바실레이아’라고 하는데 히브리어인 ‘말쿠스’와 동일하게 그분의 통치, 그분의 왕권, 그분의 지배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 그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우리가 죽은 뒤에 가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는 그 순간부터 그의 나라, 그의 통치에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연합된 자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며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판단하는 곳입니다.  

  

- 우리의 궁극적 소망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천국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나오는데, 그는 성령의 힘을 덧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데’, 3절에 ‘그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나의 외모와 나의 신체적인 조건과 내가 가진 것들로 인해 판단받아본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 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차별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살 때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걸을 수 없게 되자, 부모님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제가 7살쯤 되어 불쌍한 녀석이 밥이나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하셨던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1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시골의 초등학교에 가서 저를 입학시켜 달라고 사정하셨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셨던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오시며 소리 없이 우셨습니다. 시골 3월의 찬바람은 저의 야윈 발을 얼게 했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저의 어머니는 나의 언발을 당신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시며, ‘아가야, 춥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는 저에게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어떤 유식한 부모들의 위로보다 값지고 따뜻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아가며 이 세상의 차별과 냉대가 나의 심장과 영혼을 차가운 냉기로 파고들 때마다, 저는 항상 어머니의 그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저에게 하셨던 말씀과 동일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던 나의 하나님, 날 때부터 소경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구걸하며 살던,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일그러진 형상과 마주쳤을 때 한없는 연민의 손으로 만져주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셨던 예수님은 나의 혼돈과 어둠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 저는 그 어린 나이에 제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이 세상의 비정함을 보았습니다. 포용보다는 배척을 즐겨하는 세상의 본질을 알았습니다. 비록 7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때 제가 어머니 등에 업혀서 들었던 생각은 차별 없는 나라, 나같이 부족해도 사람대접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가 그리웠습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인용하기를 좋아합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내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되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 하나님 나라는 우리 영혼의 색깔만이 중요한 나라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는지, 하나님께 멀어져 있는지만 중요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유했고 우리의 교육 수준이 어떤지, 우리의 가족 배경은 어떤지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평등한 곳입니다. 

- 우리의 주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시는 왕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5절에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사무엘상 16장 7절,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입니다.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런 곳, 사랑 많은 왕이 다스리는 곳, 그 어느 누구도 끌어안음을 받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공의와 정직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 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4절에 보면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에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하고 합니다.  

- 여러분, 사무엘상 8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사람이 세운 왕이 그들을 오히려 착취하며, 백성들을 오히려 왕의 종이 되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심중을 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주변의 이방 나라처럼 사람 왕을 중심으로, 사람의 제도 하에서 그들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이스라엘의 인본주의적 의도를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사울로 시작된 이스라엘 왕의 통치는 결국 우상숭배, 정의와 도덕이 무너진 사회, 그래서 결국 북이스라엘의 앗시리아에 의한 멸망과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 생활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 이 세상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그랬고, 아담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선언하는 모든 피조물의 종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풍성함을 떠나, 아담과 집 나간 탕자의 궁핍에 처한 길 잃은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 여러분, 공의와 정직과 정의가 사라진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혹시 경험해 보신 적이 있나요? 저의 컴퍼스 시절 대부분은 독재 군부 정치로 정의와 진리가 무너진, 그래서 제가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는 진리 탐구와 젊음의 낭만보다, 진달래보다 더 붉은 학우들의 핏빛으로 물들던, 라일락 향기보다는 최루탄 내음으로 눈물 흘리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제는 독재와 정치 탄압은 없지만 배금주의와 세속주의가 대신 들어서 있습니다. 저는 그런 캠퍼스를 보며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선동과 사회보장 제도가 우리의 본질적인 삶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 저도 꽤나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나라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공정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또 어떤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나요? 6-8절을 보면 ‘그때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유토피아 같은 그림이죠, 여러분, 하지만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분열되어 있습니까? 지금도 벌써 전쟁이 두 개나 일어났지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려고 소리 없는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 제가 찾아봤는데요, 이게 한 1~2년 전 통계입니다. 세상의 1%가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한답니다. 그러면 하위 50%가 이 세상의 부를 얼마나 소유할 것 같아요. 0.75%랍니다. 인구의 절반이 1%의 부도 소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분열된 사회를 기뻐하실까요? 하지만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때, 야훼 하나님이 통치하셔서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찾아오고, 그들이 함께 거하게 됩니다. 절대 약자였던 자가 강자를 이끌 수 있고, 절대로 같은 삶의 영역을 공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상에서 화해의 잔치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자가 초식 동물로 변합니다. 서로 문화도 다르고 경제적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다른 사람들이 한 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형제요, 자매라 부르게 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되고 눌린 자가 해방되며, 예수님이 그의 사역 처음에 회당에서 선포하신 이사야의 말씀이 응답되는 공동체로 변합니다.  

  

□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희년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 누가복음 4: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인데요. 히브리 사람들은 수양의 뿔로 나팔을 만들어서 희연이 선포될 때 불었답니다. 

- 여러분, 희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희년에는 내가 빼앗겼던 땅들을 다시 찾을 수 있고, 내가 혹시 돈이 없어서 종이 되었으면 자유인이 되며, 또 돈이 없어서 빚을 진 사람이면 빚을 탕감받아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그런 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진정한 희년을 선포하는 그런 곳입니다. 진정한 쉼이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오직 하나님 하나만으로 우리가 종속되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그런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이런 나라에 살고 싶어요. 저는 파리로 자주 출장을 갑니다. 그곳에 가면 대학 총장을 지내셨던 노부부가 삽니다. 같이 성경 공부를 하다가 만난 분이신데요. 혹시 제가 가족들과 함께 그곳에 있는 경우에는 항상 그분의 집에 머뭅니다. 또 혹시 제가 혼자 출장을 갈 때면 파리에서 일을 보고 저녁에 늦게 들어가도 그분들은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저를 기다리시곤 합니다. 그게 밤 10시가 되었든 밤 11시가 되었든 저는 그분들의 얼굴에서 저를 한없이 기다리시고, 상을 준비하여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 우리 여호와의 얼굴을 봅니다. 여호와의 나라에서는 언어와 국적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모든 여호와의 자녀들이 주님이 베풀어 놓으신 한 상에서 희년을 누릴 것입니다.  

- 우리의 주님은 정말 진정한 희년을 선포하셨던 왕이세요. 그는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전능의 위험과 무한의 권력의 막대기로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진리의 약속된 말씀대로, 완벽한 로고스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세상과 자신, 피조물과 창조자, 죄인과 거룩한 자를 분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인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인자의 가는 길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할 집도, 환영해 주는 가족도, 돌로 떡을 만드는 그러한 능력도 포기하셨습니다. 배고파 벼이삭을 제자들과 비벼 먹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당하셨습니다. 요한이 그를 거스르는 자들에게 벼락을 내리기 원했지만 그는 오히려 간음한 여인의 돌 맞을 옆에 계시고 손 마른 자를 치유하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타당하며, 귀신 들린 자를 해방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쫓겨나며, 무한 권력의 보좌에서 내려와 낮음과 뒤틀림의 현장에 참여하심으로 그는 이 세상을 치유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기까지 사랑한 그분의 사랑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 나라는 누구나 초대되는 절대자의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 하나님 나라는 절대자의 사랑으로 가득 찬, 그래서 어떤 상처와 불의와 모순과 차별도 치유받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천국이 임할까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까요? 마태복음 22장 2절에서 1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하나님은 우리가 악하든 선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의 천국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도덕적 수준이나 우리의 선함이나 악함을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지금 있는 그대로 이 자리에서 부르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저 자신을 보아도 저는 길에 누워 있던 앉은뱅이였습니다.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은 걷지 못하고 비료 포대 위에 앉아 바닥을 기어 다니던 저를 보고 나중에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은혜로우신 나의 여호와는 합당치 못한 저를 그 나라에 초대하셔서 그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자격 없는 자를 불러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천국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있으시죠? 인생의 바닥에서 건져내 주신 주님의 은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경고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의지적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나의 일상의 생활을 적당한 은혜와 회개라는 가면으로 적당히 감싸줄 수 있는, 나의 그럴듯한 논리를 적당한 거룩함으로 포장해 줄 수 있는 2천 년대 바리새인이 누리는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향류를 깨뜨린 여인의 심정으로, 감히 고개를 들고 기도를 할 수 없었던 어느 죄인의 기도처럼,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밖에 드릴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간절한,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나에게 전부일 수밖에 없는, 내 손에 만져지는 실체와 살아있는 힘인 그런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 나라는 그 삶의 실체가 되며,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허상을 쫓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 세상의 실상이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습니까? 인격이 완벽한 사람도 아니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만 간다면 아마 여기에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예수로 채워야 하는 사람들, 자신이 너무 연약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자격 미달이지만 예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다워지려는 사람들,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 불완전한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그렇게 녹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방해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저희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고난이 내 인생에 오는지 우리는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나름 논리에 밝은 냉철한 지식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도 많은 경우에 삶에 대한 소망이 없어 누워 지내며 욥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개수하겠느냐? 이렇게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와 그 운행, 우리 인생에 두신 그분의 심오한 뜻을 잘 모르는, 어쩌면 무식한 사람입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깨달은 것은 이 우주에 숨겨진 주님의 크신 비밀들의 아주 조그마한 파편들을 가끔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점점 깨달아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창조 비밀과 운행의 비밀을 알 수는 없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은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고, 죽기까지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과 지식과 유혹으로 저를 설득하려 해도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하여 많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또 대학교 1학년을 아파서 누워 있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반지하에 살았는데요, 햇빛도 안 들어옵니다. 성경과 기도를 하며 1년을 보내면서 제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다리도 불편하고 이렇게 폐도 아프고 나를 지탱해 줄 경제력도 없고 또 내가 어떻게 될지 미래도 불확실한 저의 모습을 좀 보면서, 나의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매일 아프기만 한 저 자신을 보며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고통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떠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때 기록한 글 중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반지하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잘 들린다. 재잘대며 달려가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가벼운 발소리, 출근하는 여자들의 경쾌한 하이힐 소리, 말끝마다 욕을 집어넣어야 문장이 끝나는 중고생들의 거친 발자국 소리, 늦은 밤 술 한 잔 걸치고 비틀대며 퇴근하는 가장들의 외로운 구두소리, 그들은 매일 지나다니는 길 아래에 해가 닿지 않는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해 알까? 아마 오늘 죽어 나간다 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보고 미소 지어주실 하나님을 모른 채 그곳에 누워 있었더라면 나는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방에서 나와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가을 하늘이 이렇게 투명하게 푸르렀던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 햇살이 이렇게 눈이 부셨던가? 뺨 위를 스치는 공기가 이렇게 가슴이 툭 터지도록 시원했던가?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세상에서 고통 없이 숨 쉴 수 있고, 마음껏 태양빛을 즐길 수 있는,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인식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는 가슴으로 체득했다.』 

- 여러분, 저의 하나님은 제가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타나셔서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창세기 15장 1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되 아브라함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며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래서 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내 인생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그분의 사랑 없이는 이 우주 창조의 비밀도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 없이는 제가 지금 살아있어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 없이는 제가 1초도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없이는 저는 이 세상에서 단 일각도 살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의 영원한 기업이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인생의 외로움을, 그 외로움을 지닌 자들의 고통의 무게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셨지만 그의 무한함을 시간과 공간의 제한 아래 구속하시고, 몇십 년 후면 흙으로 돌아갈 이 나약한 육신 가운데 그분의 무한하심과 전능하심을 담아 나와 같이, 나처럼 외로워하고 나처럼 괴로워하며 밤을 지새우는 작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야훼의 하나님은 나에게 그 수많은 질문과 가슴 아픔을 허락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고난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 혹시 여러분 중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그런 분이 계십니까? 이유 있는 고난으로 성화시키십시오. 전적으로 주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주님의 손을 놓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 선한 일이 때때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로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 닥친 그 고통의 크기와 그 깊이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할 고통은 우리가 상속받은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길어야 100여 년이지만, 그분의 나라에서 살 날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우리 하나님 절대자에게만 무릎 꿇는 길은 어쩌면 외로운 길이고 좁은 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 여호와의 오른손이 그에게만 무릎 꿇는 모든 여러분을 인도하고 붙드실 것입니다. 저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을 믿으시고, 여러분도 힘내시고 믿음의 경주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임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 나라를 은혜로 받고 그의 은혜를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의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염려 대신 그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러분, 무엇으로 감사합니까? 하나님 아니었으면 단 한순간도 숨을 쉬며 살아있지 못할 이 나약한 피조물을 지금도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너무나 크셔서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그분이 이 더럽고 추한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이 추하고 나약한 자 안에 성령으로 내주 하시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비록 내 몸은 병들고 약할지라도 그 어떤 것보다 강한 그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 나의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지은 죄로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의 풀무불에, 사자굴에 던져야 마땅한 나를 예수님이 사탄의 권세를 가루처럼 부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를 그의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감사할 대상입니다.  

  

- 저는 저의 인생을 돌아보며 감사의 제목들이 참 많습니다. 첫 번째는 저에게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던 부모님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거부로 돌아오는 찬바람의 길에서 자신의 주머니에 내 언 발을 넣고 손으로 주물러주셨던 나의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세상에서 춥고 외로울 때마다 저를 지켜준 힘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가난 때문에 저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가난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분들이 가난하였고, 그분들이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한 배움은 정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했던 저희 부모님을 하나님이 저에게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내 부모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내 부모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내 부모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 내 부모는 왜 이렇게 사회적인 커넥션이 없을까? 이렇게 고민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혹시 내 아이들은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내 아이들은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이렇게 못난 부모, 못난 자녀들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그들 때문에 여러분의 인격이 예수님처럼 변하고 그들 때문에 여러분이 매일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초등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 공부하는 법을 배웠어요. 학교를 갈 수 없으니까 혼자 책을 읽고 혼자 더하기, 빼기를 배웠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걸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고 하잖아요. 학교를 못 가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공부하게끔 하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많은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십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별 볼일 없고 능력 없어 보이고 머저리 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눈에는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에 선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해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여러분, 저희에게 주어진 것들은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고 잘나서 받은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 그것 때문에 너무나 콤플렉스 가지고 슬퍼하지 마세요.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더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게 돼요. 전 재활원에서 보조기를 처음 찼습니다. 지금도 양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목발을 짚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기도 힘들고 오래 걷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저는 그러한 신체적 약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어디에 가려면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버스에 올라탈 수 있는지 그런 걸 미리 다 체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기도해요. ‘내가 가는 그 길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고 저에게 돕는 자들을 붙여주세요.’ 여러분, 제가 짚은 목발과 이 다리가 너무 불편해 보여도 저는 그래도 이걸 가지고 세상에 걸어 나가는 걸음마를 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불편한 보조기와 목발을 짚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요.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속으로 기도하며 살아요. 왜냐하면 제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니시면 제가 어디 갈 수도 없고 그분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제가 이동도 못해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아주 가까워졌어요. 왜냐하면 그분에게 항상 기도를 하니까요.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오히려 감사하는 법을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감사하시겠지만 오히려 가지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해 보세요. 그리고 내가 가진 것도, 못 가진 이웃을 위해서 한 번 기도해 보세요. 그것이 감사의 본질입니다. 나에게 주어지지 못한 것,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마시고 내가 가진 것조차 가지지 못한 이웃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뵙고 싶습니다. 

  

-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뵙고 싶습니다. 이사야 11:9-10절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니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완성된 주님의 나라에서는 해함도 상함도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픔도 분열도 이별도 없을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어렸을 때 하늘나라로 자녀들을 보내신 분들이 있나요? 아니면 너무나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가지신 분들이 있나요? 지금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린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에 다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시지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에 저도 건강한 다리로 여러분과 덩실덩실 그런 춤을 출 날을 기다리며 삽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위로부터 오는 빛을 의지하며 처절한 인생의 바닥에서도 다음 순간을 인도하시는 야훼의 팔을 놓지 않으실 여러분께 시편 30장 11절, 12절 말씀을 드리고 마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우리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마칩시다. 제가 짧게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어둠 가운데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를 생명의 빛이 거하는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예수의 피로 정결하게 되어 당신이 택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고,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나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 원합니다. 저를 있는 이 모습대로 받아주시는 주님, 나의 겉사람은 날로 쇠하여 가지만 이제 저의 속사람은 주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기 원합니다. 당신에 대한 목마름으로 당신 앞에 엎드립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시든 영혼을 일으켜 주시고 전능하신 당신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원합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우리의 평생 가는 길에 동행하여 주셔서 주님 따라갈 때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결어 및 기도 

  

1) 저희가 김인강 교수님을 어렵게 모셨습니다. 우리 교수님께서 그런 간증을 해주시지 않았지만 우리 교수님은 13살 때 기적적으로 목발을 짚고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13살의 나이에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정말 공부도 잘하셨던 것 같아요.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해서 차석으로 졸업을 하셨고, 이후에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40년간 수학계의 난제였던 저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데, 서스턴 가설을 처음으로 해결하고, 기하학 이론인 쌍곡구조 변형 공간의 가장자리를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또 2021년에 한국과학상을 수상하셨다고 합니다.  

2) 참 우리에게 많은 도전이 되는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지금도 전쟁과 기근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차별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이고 그 완성된 나라에서 우리 교수님이 간증했던 것처럼 정말 차별이 없는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원래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했던 원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정말 와닿았던 말씀은 감사의 본질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얻고자 하고, 또 소유하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지만 오히려 가지지 못한 것을 위해서 감사하고 또 가난과 배우지 못한 부모를 주신 것으로 인해 감사하다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찔림이 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3) 첫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이해할 수 없는 고난도 있고, 견디기 힘든 외로움도 있고, 정말로 어려운 상황과 환경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나 마음에 임하게 도와주십시오. 주님이 통치하시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내 가정에 임하게 도와주시고, 내 삶의 인생 가운데 임하게 도와주셔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고, 주님이 재림한 그날에 온전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속에 살게 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주여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나라가 아닌, 내 욕망이 나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왕 되신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정 가운데도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왔을지라도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시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왜 우리 부모는 가난할까? 왜 나의 부모는 그렇게 무식한가? 왜 우리 부모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할까? 또 우리 자신을 살핀다면 나는 왜 이렇게 약할까?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 교수님의 간증은 정말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지지 못한 부모, 가난한 부모, 배우지 못한 부모로 인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체 약점 때문에 도리어 감사하다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내 자신의 외모와 신체와 또 끊임없이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렇게 인생을 살아온 분이 너무나 많이 계십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 교수님은 그렇게 살아왔지만 도리어 부모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감사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당당하게 하나님이 세워주신 거 아닙니까? 이 시간에 감사의 본질을 깨닫고 여러분 정말 다시 한번 부모님에 대해서 감사하고 여러분들이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감사하고 여러분의 그 약함 때문에 나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도리어 더 감사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이제 불평과 원망이 아닌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면서 주님 한 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회개합니다.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왜 나의 부모는 이렇게 배우지 못했을까? 왜 나의 부모는 나에게 이렇게 가난을 물려줄까? 끊임없이 부모를 원망한 우리들의 죄악을 용서해 주십시오. 끊임없이 내 자신을 비교하면서, 지독한 그 외로움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우리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불평하고 좌절했던 우리들을 주님, 이 시간 회개합니다. 하나님! 오히려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이 더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어, 도리어 많은 것을 가진 풍족함 때문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가진 것이 없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내 인생에 더 큰 축복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입술에 감사가 떠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안에 감사의 영적 DNA가 새겨져서 우리 인생의 남은 시간, 원망과 불평이 아닌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고, 감사하는 자로 살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