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김은호 설립목사 주일설교/2023년 주일 설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이사야 43:3-4) 2023.07.16

smile 주 2023. 7. 24. 14:00

2023.07.16  한 주간의 말씀 요약 - 씀 리뷰 66회 

https://youtu.be/f-xBrph1uMk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이사야 43:3-4)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고 해도 내 인간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고 조건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경건치 않을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심지어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4절 a)누가 누구를 사랑했다고 말합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사랑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요일 4:10a)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사랑하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등한 조건과 만남 속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고백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누가 먼저 고백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왕과 평민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는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의 감정과 느낌은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먼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롬 8:35a)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 어떤 상황도 심지어는 나의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내어 주신 사랑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3절을 보면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3)고 말씀하십니다. 4절도 보면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말씀이 다 너를 대신하여"내주었다"입니다.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애굽을 속량물로,구스와 스바를 대신하여 주셨습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나라였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애굽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애굽이라는 큰 나라를 속량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까? 당시 세계 최강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페르시아 곧 바사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하시고 바사 왕 고레스에게 칙령을 내리게 하심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사 왕 고레스를 감동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귀환하게 했는데 그

대가로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강력하고 힘 있는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대속물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속량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없는 사랑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가짜 사랑입니다.

 

확인받고 싶은 사랑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통해 그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야 나 사랑해?"라고 묻고 엄마 아빠도 어린 자녀들에게 "엄마, 사랑해?""아빠 사랑해?"라고 묻곤 합니다. 아니 죽어가면서도 묻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임종의 순간에 가장 많이 오고 가는 말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할까요?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을 받아야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내 아들과 딸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내 아들과 딸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나는 내 남편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데 남편은 어느 정도 날 사랑하고 있는지, 나는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데 엄마 아빠는 날 정말로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그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그 아들을 잡으려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백세에 낳은 네 아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가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확인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당신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이 고백이 당신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