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다니엘 기도회 간증

내가 사랑할 예수님을 찾아 (마태복음25:31-40) - 서진교 목사(11월 7일)

smile 주 2023. 12. 4. 10:05

 

 

□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 

  

-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우리에게 유언처럼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당신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십니다. 구원받은 의인들은 양의 무리라 하여 오른편에 두시고, 구원받지 못한 악인들은 염소의 무리라 하여 왼편에 두십니다. 예수님은 오른편의 의인들을 바라보며 칭찬하십니다.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거 줘서 고마웠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거 줘서 고마웠어. 내가 나그네일 때 영접해 주어 고마웠다. 내가 헐벗었을 때 옷 입혀줘서 고마웠어.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줘서 고마웠다.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면회 와줘서 고마웠어.” 주님은 그 의인들을 바라보시며 나를 사랑하고 섬겼으니,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의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내가 예수님에게 밥을 드린 적도 없고, 물을 떠드린 적도 없고, 옷을 입혀드린 적도 없고, 집에서 재워드린 적도 없고, 간호해 드린 적도 없고, 면회 간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나한테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을 하시니까 그 의인들이 의아해하며 주님을 보는 겁니다. 그때 주님이 그 의인들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려 병든 자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고 하십니다. 그제야 의인들의 의문이 해소가 되었어요. 내가 만났던 이웃들이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이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까? 이 은혜를 내가 어떻게 갚을까?’를 고민하다가 세상 사람들은 외면해도 예수님은 주목해 보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서 그를 사랑하고 섬겼을 뿐인데, 주님은 “네가 섬긴 그가 바로 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지극히 작은 자를 마음에 두셨어요. 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인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 주님은 지난 날 지극히 작은 자인 제게도 찾아오셨습니다. 오래 전에 한 유명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자기가 어릴 때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서 너무 힘들었는데 어머니의 신앙, 어머니의 기도로 이겨냈다는 간증을 하시는 겁니다. 그 간증을 듣는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저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목사님이 부러웠어요. 왜냐하면 부모님 두 분 중에 한 분이라도 반듯하게 서 계신 분이 있다는 게 부러웠어요. 이 세상에 기댈 언덕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 두 분 다 알코올 의존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술 취해서 길에 쓰러져 있는 엄마 아빠를 찾으러 다녔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끊임없이 술을 드시고 문제를 일으키시는 아버지, 그런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해서 술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 저는 끼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안 하시니까 집에 먹을 게 없었어요. 밀가루로 수제비 해 먹던가, 아니면 어쩌다가 쌀을 어디서 구해 오시면 어르신들은 아실 거예요. 쌀이 한 4~5년 되면 이게 곰팡이가 들어서 초록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그 쌀을 빡빡 씻어서 먹곤했습니다. 제 키가 193cm인데, 그때 잘 먹었으면 2m가 넘었을 거예요. 그때 잘 먹지 못해서 많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 어릴 때는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울지 않더라고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알았습니다. 눈물이라는 것도 아무나 흘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무언가 상황이 바뀔 일말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 흘릴 수 있는 게 눈물이라는 걸 알았어요.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는 걸 깨달으면 울지 않습니다. 아무리 울어도 봐주는 사람 하나 없으면 울지 않습니다. 저는 그걸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거예요. 집에서 아무리 우당탕 소리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아프기 싫어서 마음만 마비시키려고 그랬는데 이 얼굴까지도 마비가 될 줄 몰랐습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는 표정도 생기도 없는 우울한 아이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이 학교 끝나면 전부 다 PC방에 갔습니다. 저도 따라가 보았는데, 모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했습니다. 따라서 해봤는데, 제가 게임에 재능이 있는 겁니다. 친구들은 이미 1년씩 했는데, 저는 게임을 한 지, 세 달 만에 저희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아이가 되었어요. 그 게임은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입니다. 온라인에 접속하면 전 세계 랭킹이 나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쯤 되었을 때, 제가 랭킹 최상단에 있었습니다.  

- 서울에서 프로게임단에 들어와 전문적으로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정말 너무 가고 싶어서, 어머니께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십니다. 저희 어머니는 천사이시거든요. 남편을 잘못 만나서 술 때문에 그렇지, 저희 어머니 정말 착한 분이십니다. 어머니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어 고3까지 버텼습니다. 몇 개월만 더 버티면 졸업인데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결국 학교를 나왔고 제적 처리가 되었습니다.  

- 서울에 있는 프로게임단에 들어갔습니다. 지긋지긋한 집과 가난을 탈출하고 싶었어요. 그 게임단에서 하루에 20시간씩 게임을 했습니다. 게임단에 숙소가 있었는데 들어가지 않았어요. 그냥 게임하다가 책상에서 한 2시간 정도 엎어져 자고, 하루 종일 게임만 했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 게임을 하니까, 당시에 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제 아이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어요. 제가 게임에 접속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저를 막 칭찬해 주었어요. 저한테 막 스승님, 스승님 하며 자기를 제자로 삼아달라고 합니다. 그러고 제 얼굴 본 적도 없으면서 저한테 잘생겼다고 그러는 거예요. 적어도 그 게임 세계 안에서는 제가 왕인 겁니다. 그때까지 살며 그 어디에서도 인정도, 존중도, 환대도 받지 못했던 제가 이 게임이라는 세계 안에서 왕이 된 겁니다.  

- 그런데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한 겁니다.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정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고, 정말 고지가 보이고, 뭔가 길이 열릴 것 같은데, 그 마음 한 구석의헛헛함을 제가 어떻게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밤새 게임을 하다가 문득 시계를 봤는데 새벽 4시인 겁니다. 저도 모르게 “새벽 예배할 시간이네” 제가 혼잣말을 이렇게 하고 뭐에 홀린 듯 일어나서 교회로 걸어갔어요. 교회는 걸어서 1시간 거리였습니다. 저는 새벽예배를 다녀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새벽예배를 간 겁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교회 의자에 딱 앉는데, 누군가가 저를 꼭 끌어안아주는 것 같았어요. 따스한 기운이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살면서 누가 저를 안아준 적이 없어요. 따뜻함이라는 건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처음으로,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이라는 걸 경험해 본 겁니다. 그때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에 다 나갔습니다. 모든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 오전, 오후, 저녁 예배에 다 갔습니다. 

- 그리고 그즈음 청년부에서 동계 수련회를 한다는 광고를 들었습니다. 제가 좀 고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니면서 수련회를 다 따라갔지만 한 번도 은혜를 받은 적이 없어요. 애들이 막 울면서 기도하고, 하나님 만났다고 자랑하는데, 저는 눈물이 메말라 안 나는 거예요. 울면서 기도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서 기도하면서 슬픈 생각도 하고, 허벅지를 꼬집고 해도 눈물이 안 났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수련회는 좋은 기억이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청년부 동계수련회를 따라가고 싶어서 따라갔습니다. 근데 뭔가 좀 다르더라고요. 첫날부터 마음이 들썩이는 거예요. 그리고 셋째 날 저녁 집회 때 앞에 계신 강사 목사님이 회개 기도를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회개 기도를 시작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분명히 눈을 감았거든요. 눈을 감았는데 감은 눈에 뭐가 보이는 거예요. 제가 지난날 살아왔던 삶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지었던 죄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회개 기도가 쉽더라고요. 보이는 걸 회개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회개하는 순간 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간 울지 못했던 눈물을 그날 하루에 다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 회개하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다녔기에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걸 제가 머리로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슴으로는,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었거든요. 그 순간에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게 마음으로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 예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음이 믿어졌어요. 알코올 중독의 부모님, 지독히도 가난한 가정, 고등학교를 자퇴하여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저 같은 인생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셨으니, 저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여겼는데, 태어나지 말아야 될 존재라고 여기며 살았는데, 제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께 사랑받는 존재였음이 깨달아진 거예요. 그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한참을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눈물을 되찾았고, 웃음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 어둡게만 보이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심지어는 길가에 핀 잡초조차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을 만났지만 알코올 중독과 가난은 그대로였어요. 집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니까 살더라고요. 저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주님은 저에게 새로운 꿈을 주셨습니다. 저를 목회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독학으로 검정고시와 수능을 봐서 신학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신학대학교에 입학한 저에게 예수님은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이 말씀을 제 인생의 모토로 주셨습니다. 노숙자와 장애인들을 위해 살라는 감동을 주셨어요. 그때부터 청량리역에 있는 노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빵 하고 음료를 사서 나눠 주고, 인근 식당에 데리고 가서 같이 식사하고,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던 신학교에 장애인 봉사 동아리가 있어서 장애인 봉사 활동도 하고, 방학 때는 동아리 하고는 별개로 장애인 캠프에 갔고, 소록도로 봉사를 갔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하는 나날들이 너무 행복했어요. 

-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금요일마다 친구들과 삼각산에 올라가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추운 겨울 늦은 금요일 밤에 삼각산에 올라가려고 평창동 정류장에 내렸습니다. 소복이 눈이 쌓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웬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게 보이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제가 황급히 달려가서 부축했습니다. 다행히 정신을 차리셨어요. 아저씨에게 사는 곳이 어딘지 물었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어딘가 보니 맞은편 길 건너에 교회가 하나 있었고, 그 교회 뒤쪽으로 삼각산 능선이 쭉 이어지는데, 산자락에 허름한 천막이 하나 있었어요. 이분이 노숙자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저씨한테 이렇게 추운데 이 길바닥도 안 되고, 아저씨 집도 안 된다고, 여기 지금 교회 불 켜져 있잖아요. 교회에 가보세요. 교회 가면 사람들이 도와줄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제 말을 듣던 아저씨가 가만히 계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못 가요.” 그 아저씨의 말을 듣는데 누군가가 망치로 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았어요.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주머니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아저씨 손에 쥐어드리고, 아저씨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 드렸어요. 그리고 같이 기도하려고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어 아저씨한테 인사하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보통 삼각산에 올라가면 나라와 열방을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할 게 수만 가지인데, 저는 그날 그 아저씨 한 사람만을 위해서 밤새 기도했어요. 저는 그 일이 평창동의 그 불 켜진 교회, 그 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이 많은 교회의 현실이라는 걸 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 그런 우리와 달리 우리 예수님은 늘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허름한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은 밤에 양 떼를 지키던 몇 명의 목자들이 전부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천대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겁니다.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천사가 목자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곳에 그 구주 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너희를’ 위하여 왔다는 거예요. 여기서 너희가 누구입니까?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지금 천사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찬양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갑자기 대규모 천군 천사들이 하늘을 뒤덮더니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어요.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역사상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장면의 유일한 목격자는 바로 목자들이었습니다. 마침내 목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그 마구간에 도착했어요. 말 구유에 잠든 그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목자들의 마음에 전율이 있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를 보았다는 감격으로 충만했을 거예요.  

- 그런데 한 가지 더 감동적인 것이 있습니다. 집이 아니라 양 떼들 틈에서 잠을 자는 목자인 자기들처럼, 예수님이 동물들 틈에서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나처럼 작은 자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나와 같은 모습으로 주무시고 계신 모습, 나와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계신 모습을 본 그 목자들의 마음에 전율이 생겼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왕의 아들이나 귀족의 아들로 왔다면 목자들은 알았어도 가지 못합니다. 불편해서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편해하지 말라고 처음부터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우리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여관에 방이 없다고 예수님이 못 들어간다.’ 이거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하나로 세상을 지으신 분이 십니다. 이 예수님이 여관에 방 하나 내는 거 일도 아닙니다. 말씀 한 마디면 여관을 뚝딱 지으세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굳이 여관에 딸린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바로 목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여관방에서 태어나셨다면 목자들이 곤란했을 겁니다. 여관에 들어가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한 목자들은 돈이 없습니다. 설령 목자들이 여관에 들어가고 싶어도 주인의 제지를 당합니다. 쫓겨납니다. 네가 뭔데 여기 들어오냐며 면박을 받고 쫓겨납니다. 만약에 지금 저기에서 예배당 뒷문을 열고 노숙자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저는 압니다. 목자가 여관에 가면 왜 남의 여관을 기웃거리냐고 그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구간으로 오신 겁니다. 동물 우리에 오신 거예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는 동물 우리로 오신 겁니다. 돈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죄가 많아도, 누구라도 찾아오라고 처음부터 가장 낮은 데로 오신 거예요. 

  

□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다니셨습니다.  

  

- 목자들이 예수님을 먼저 찾아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목자들을 찾아가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30세가 되던 해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냥 전도하시면 되어요. 그냥 앉아 계셔도 알아서 오기 때문에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에 주님은 그냥 앉아 계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어떻게 하십니까? 항상 돌아다니시죠? 그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다가 항상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십니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항상 낮은 데예요. 항상 지극히 작은 자가 있는 곳이에요. 아무도 찾지 않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십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숨어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기어이 찾아내셨어요. 그리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작은 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가 가까이 온 줄 아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다 모으세요. 그리고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주님이 이제 곧 십자가 지실 걸 아시거든요. 이제 곧 죽으실 걸 아세요. 그런데 기쁘다고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쁘시면 “내 기쁨을 너희들도 가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땀방울에서 핏방울이 날 정도로 간절히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하세요. 기도의 제목은 하나였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걸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단 한 번도 자신의 필요를 놓고 기도한 적 이 없으세요. 단 한 번도 예수님은 당신께서 필요한 걸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으세요. 그런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걸 기도하신 겁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는 결코 쉽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것이었어요. 고통스러운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의 무거움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더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 자녀를 키우다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당연히 병원에 갈 일이 있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많이 아파서 오랫동안 병원에 있기도 합니다. 아이가 주사를 맞거나 힘든 치료를 받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다 똑같습니다. ‘내가 대신 저 주사 맞아서 내 자식이 나을 수 있다면 내가 백 번, 천 번이라도 대신 맞을 텐데, 내가 내 새끼의 고통을 대신 가져와 당할 수 있다면 천 번, 만 번이라도 아플 텐데.’ 하는 게 모든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안 됩니다. 대신 주사를 맞을 수도, 대신 아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에게는 그게 가능하셨어요. 우리 대신 주사를 맞아줄 수 있으셨어요. 우리 대신 고통을 당할 수 있으셨어요.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살릴 수 있으셨어요.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셨어요.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신 겁니다.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이사야가 이미 예언을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기뻐하신 거예요. 당신께서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길이기에 그냥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긴다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기에,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길이기에,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주님은 처음부터 죽는 길인 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천사들이 찬양했어요.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은 기뻐하심을 입은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당신께서 고통당함으로 우리가 살 걸 아셨기 때문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내가 기쁘다고 하시는 거고, 그 기쁨으로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걸어가시어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양 옆에 강도가 함께 달립니다. 그들은 무슨 큰 강도짓을 했는지 사형수였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앞에는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이, 양 옆에서는 강도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그러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 모르고 그러는 거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간구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의 기도에 즉각 응답해 주세요. 강도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요. 갑자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예수님을 욕하던 강도가 오히려 맞은편에 있는 강도를 꾸짖습니다. “너나 나나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지만 이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결국 강도는 죽는 자리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숨이 끊어져 가시는 순간에도 지극히 작은 자인 사형수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죠?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유형의 작은 자는 바로 감옥에 갇힌 자였어요. 감옥에 갇힌 죄수를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가는 차원을 넘어 사형수를 찾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신 와중에도 사형수를 구원해 내셨어요. 십자가 위에서까지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은 지극히 작은 자로 시작하여 지극히 작은 자로 마칩니다. 예수님은 처음 목자로 시작하여 사형수로 마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내셨던 공생애의 삶이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모범인 겁니다.  

  

□ 예수님을 따라 지극히 작은 자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지극히 작은 자들과 더불어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장애인 봉사를 다니고, 병원의 환자들을 심방하고, 노숙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작은 자를 섬기다가 상처받는 날들도 많았어요. 노숙인에게 속고 배신을 당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날들이 참 많았어요. 그럼에도 주님은 저를 붙드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사역으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 주님이 신림동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인 신현중앙교회에서 사역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회 인근에 노숙인들이 모인 광장이 있어서, 교회에서 매주 빵하고 음료수를 사서 노숙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저희 담임목사님이 한 노숙인을 전도했습니다. 그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큰 형님이었어요. 리더십이 있어 모든 노숙인들이 잘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도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이분이 술을 끊겠노라며 교회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셨습니다. 2년 동안 교회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하셨어요. 담임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마음을 합하여 이분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이분이 결국 술을 끊었어요. 그리고 자기 직업을 얻어서 아파트 경비일을 지금 3년째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얻고 나가서 자립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복음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이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가장 낮은 데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살면서 받은 무수한 상처로 인해 수많은 가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은 그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 노숙인의 변화에 주변에 있는 다른 노숙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정말 그 형님이 술을 끊었어.’ 하면서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노숙인들이 교회로 오는 건 좋습니다. 문제는 다 술에 취해서 옵니다. 예배 시간마다 곤욕을 치를 때가 많아요. 제가 앞에서 찬양 인도하고 있으면 트로트로 화음을 넣으세요. 담임 목사님 설교하고 계시면 갑자기 마대 들고 교회 바닥을 닦습니다. 정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노숙인들이 어떤 일을 해도 저희는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숙인이 복음을 들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노숙한 분들에게는 행려병이라는 게 있어요.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습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던 한 노숙인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노숙인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물론 난동을 부리면 진정시키긴 하지만 끝까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 하루는 두 명의 노숙인이 예배에 왔습니다. 앞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이 노숙인 둘이 서로 시비가 붙었어요. 서로 욕을 하더니 주먹다짐을 하는 겁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뜯어말리고 겨우 진정시켜 따로 자리에 앉혔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합신’이라는 교단의 목사거든요. 예배의 태도를 굉장히 중요시하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이게 너무 힘든 거예요. 이런 모습들이 고통스러워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오래전에 삼각산에서 만났던 그 노숙자 아저씨가 떠올랐어요.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못 가요.’ 했던 그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났던 많은 노숙자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교회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했던 기도들이 떠올랐어요. 제가 이렇게 기도했거든요. ‘하나님, 노숙인이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는 교회를 개척하거나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해 주십시오.’ 신실하신 주님이 저의 기도에 응답하신 거더라고요. 저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저를 노숙인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게 하셨더라고요. 그 순간 원망이 감사로 변하더라고요. 그 아픔이 기쁨으로 변하더라고요. 그때의 일로 저는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시더라고요.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것이 정돈되고 순서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오롯이 올려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죠.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예배드릴 수 없는 사람들 곁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예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더라고요. 예배할 수 없는, 도저히 예배에 집중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예배할 때 주님이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시더라고요.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를 하시더라고요. 우리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는 그 주님이 너무 믿어지더라고요. 잘했다 칭찬하시는 주님,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시는 주님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 굿윌스토어, 장애인 자립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 신실하신 하나님은 저를 장애인 사역으로도 인도하셨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굿윌 스토어에서 사역하게 하셨어요. 굿윌스토어는 아름다운 가게처럼 사람들이 기증한 물품을 판매합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직원이 장애인이라는 게 달라요. 장애인이 직접 물건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일을 합니다. 일을 하여 월급을 받아 자립을 하는 거예요. 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의 자립을 돕는 일이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장애인들이 일을 하여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월급을 받아 저축하고, 엄마 아빠 외식도 시켜드리고, 생신이라고 생신 선물도 사드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그래서 얼굴이 해맑은 장애인 직원들을 보는 게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행복한 나날을 지냈습니다.  

- 3년 전이었습니다. 제가 장애인 자립 사역을 한창 할 때였어요. 저한테 딸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딸아이가 3살이었는데 그때 저희 딸아이가 뇌전증과 발달장애 진단을 받아요. 그리고 지난달에는 자폐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가 장애인 사역의 사명으로 부름 받았는데, 이제 당사자가 된 거예요. 며칠 동안 힘들었습니다. 제가 하나님한테 혼잣말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엄마 아빠랑 살던 내 원가족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또 그러시네. 왜 나한테만 그러시지?’ 제가 잠깐 며칠 그러다가 금방 괜찮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둔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자식이 장애가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아이에게 장애가 있어도 여러분이 자식 보듯이 똑같이 사랑스럽고, 존귀하고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저희한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괜찮더라고요.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습니다. 사회적 편견이에요. 아이가 자라고 나서 맞이할 세상이 염려되었습니다. 아이가 봐도 따가운 사람들의 눈총이 벌써부터 두렵더라고요.  

- 장애아를 둔 부모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은 사형 선고 날이다.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이 그 부모에게 사형 선고날이라는 거예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에서 맡아주고, 돌봐주고, 이런저런 활동도 했지만 졸업 후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갈 데가 없어요.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하기가 어렵고 설령 직장을 잡는다고 해도 비장애인들의 무시와 폭언으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또 알아요. 발달장애인들이 모르는 거 같아도 다 압니다. 만날 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맨날 집에 있는 겁니다. 불 꺼진 방에 누워 있는 자기 자식 챙기는 게 어머니들의 사명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들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세요. 진짜로 날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 아이보다 딱 하루만 늦게 죽게 해 주세요.’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날마다 간구하십니다. 아이의 삶을 평생 책임지고 죽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립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부모의 마음에 응어리가 풀려요. 한이 풀립니다. 저는 그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마음에 한이 풀린 어머님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제가 굿윌스토어에 있을 때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 직원들 어머님들이 오세요. 어머님들이 저희 손을 잡고 고맙다 그랬어요. “너무 감사해요. 혼자 외출도 못하던 애가 혼자 출퇴근을 하고, 콘서트, 축구장 경기 구경 가고, 친구 생겼다고 나가고, 맨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하면서 저희들의 손을 잡고 그렇게 고맙다고 하십니다. 

  

□ 주변의 장애인 자립 스토어를 방문해 주십시오. 

  

-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1만 장애인 파송 운동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교회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해소하는 일에 동참해 주길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을 가난한 이웃들, 과부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들이 사용하지 않는 물건, 여러분들의 잉여 자원들을 장애인이 일하는 곳에 기증하거나, 후원을 하거나, 찾아갈 때 그들의 사역이 성장하고, 더 많은 장애인들이 고용되는 것입니다. 굿윌스토어는 여러분들이 주시는 그 귀한 선물들을 모아서 장애인을 자립시켜야 합니다. 굿윌스토어와 똑같은 형태로 의정부와 경기 북부 지역에 ‘숲스토어’가 있습니다. 김경호 목사님이 운영하고 계십니다. 정신장애인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훈련시켜서 바리스타가 되게 하고 오랫동안 자립하게 하는 ‘히즈빈스’ 그리고 발달장애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통해 유기농 빵을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함으로 그들의 자립을 돕는 ‘큰 숲 베이커리’ 이런 곳들이 여러분들이 사는 지역에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곳을 찾아가십시오. 자원봉사 신청서를 쓸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가시면 돼요. 가셔서 장애인을 만나시면 됩니다. 기증을 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면 거기엔 더 많은 장애인들이 일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장애인을 만나고 1만 명의 장애인 일터들이 생긴다면 수백만 명의 비장애인 편견이 해소가 됩니다. 편견 해소의 가장 강력하고 빠른 방법은 만남입니다. 장애 인식 개선이 중요합니다. 만남이 가장 빠릅니다. 만나면 아무렇지 않아요. 그냥 똑같아요. 만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주변에 장애인 매장이 있다면 찾아가십시오. 도와주세요. 후원해 주세요. 기증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때, 만 명의 장애인이 자립을 하고 수백만의 비장애인들의 편견이 해소됨으로 저희 아이가, 저희 딸이 자라서 맞이할 세상은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 지난주에 저는 굿윌스토어를 사임했습니다. 매일 제 아이의 재활 치료를 다니고 입원이 잦아서, 정상 출근이 불가능했습니다. 비록 제가 굿윌스토어는 떠났지만, 1만 장애인 파송 운동은 계속됩니다. 이런 장애인 기관들을 알리고, 동역하게 하는 일을 쉬지 않을 겁니다. 제 딸아이와 같은 아이들이 맞이할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이 보시고 좋았더라 할 만한 세상이 되도록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 예수님은 자신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 말씀의 결론입니다. 제 아내하고 연애할 적에 아내가 가난한 저를 참 살뜰히 챙겼습니다. 옷도 사서 입히고, 신발도 사서 신기고, 제가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길 가다가 휙 하고 쓰러졌는데, 그런 제가 걱정되어서, 아내는 저랑 만날 때마다 논현역에 있는 정관장 매장에 끌고 가서, 홍삼 진액 한 병에 30만 원짜리를 사줬어요. 집에 가지고 가서 티스푼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퍼먹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살아있는 겁니다.^^ 하루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아내가 목도리를 사 왔어요. 목도리가 너무 좋아 보였고, 제 키에 맞게 목도리가 길었습니다. 아내가 신경 써서 백화점 한정판으로 특별히 사 온 것입니다. 구하기 어려우니 잘 매고 다니랍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것만큼은 노숙자에게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제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한 2주 정도 잘 매고 다녔어요. 하루는 아내를 만나려고 이른 아침에 논현역에서 내렸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새벽 좀 넘은 시간에 저 멀리서 노숙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제가 움찔했습니다. ‘이건 안 되는데, 이거 주면 큰일 나는데, 이번엔 나를 진짜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제가 이미 가고 있었어요. 가서 보니까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굉장히 마르셨고, 얇은 회색 점퍼를 걸친 채 떨고 계셨어요. 그래서 제가 목도리를 벗어서 그분 목에 감아드렸습니다. 그분이 저를 한 번 쓱 올려다보시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서 가셨어요. 제가 그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목도리가 아까워서 바라본 게 아니라 왠지 저한테 찾아온 예수님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 예전에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이 말씀이 전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곧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니 제자들에게 작은 자들을 맡기신 것으로만 알았어요. 제가 지극히 작은 자들과 더불어 살려고 애쓰면서 어느 날 이 말씀이 저한테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말씀이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걸 알았어요.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예수님을 그리워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신 겁니다. 제자들이 주의 길을 가다가 곤고하고 그 마음이 무너져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찾아오는 길을 알려주신 거예요. 예수님이 ‘내가 보고 싶으면 저 하늘이 아니라 낮은 데를 보면 돼, 내가 보고 싶으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찾아가면 돼. 그러면 그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하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제 신앙생활이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하늘을 향해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고 응답이 없을 때, 복장이 터져서 미칠 거 같을 때, 저는 바로 낮은 데를 갔습니다. 서울역으로 달려갔어요. 청량리역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작은 자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임재하시더라고요. 주님이 거기 계시더라고요. 어디 계신지 아무리 물어도 아무리 물어도 응답이 없으셨던 주님이, 강대상도, 십자가도, 아무것도 없는 그 황량한 거리에, 주님이 거기 계시더라고요.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 여러분, 예수님이 보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은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지 않아요. 우리 주변에 계십니다. 낮은 데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지극히 작은 자와 지금도 함께하세요. 예수님처럼 낮은 데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행복은 예수님과의 동행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은 낮은 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세요. 언제든 누구라도 찾아오라고 가장 낮은 데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은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날마다 입술로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삶 속에서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건 결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믿는다면 지극히 작은 자가 곧 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해야 해요.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기도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지하철 계단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보육원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장애인 복지관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양로원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마석 가구공단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소년원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병원에 계실까? 내가 사랑할 예수님이 감옥에 계실까? 우리가 물어봐야 합니다. 여러분, 물어보시면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시는 감동이 있을 거예요. 떠오르게 하시는 장소나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럼 가세요. 가시면 됩니다. 가기 전에 엄청 고민하실 거예요. 근데 막상 가면 아무렇지 않아요. 오히려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히려 가서 예수님의 손을 잡아요. 그곳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을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겁니다. 우리는 양의 무리에 서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실 겁니다. “아무개야, 참 고마웠다. 나 배고플 때 먹을 거 줘서 고마웠다. 나 목마를 때 마실 거 줘서 고마웠어, 나 집이 없을 때 돌봐줘서 고마웠다. 추울 때 이쁜 옷 벗어줘서 고마웠어. 나 아플 때 간호해 줘서 고마웠다. 나 갇혔을 때 면회 와줘서 고마웠어.” 주님은 우리 손을 잡고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실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겁니다. 영원한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그날에 우리는 주님과 이 땅에서 나눈 추억을 이야기할 겁니다. “예수님, 저 정말 예수님인 줄 몰랐어요. 제가 드린 작은 것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진짜 고마웠다. 너 겨울 잠바도 딱 하나 남은 거 내가 아는데, 벗어줘서 고마웠다. 니 덕분에 따뜻했어.” “주님, 제가 감사해요. 잠바를 벗어드렸지만, 주님이 저를 안아주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추웠어요. 주님 감사해요.” 우리는 낮은 데서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겁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함께하신 예수님과 나눈 사랑 이야기는 영원히 남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낮은 데로 가야 돼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추억을 쌓아야 됩니다. 저 천국에서 영원히 나눌 이야기를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 천국의 기쁨은 이 땅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과의 동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낮은 데로 달려가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하심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사시는 저와 참여 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결어 및 기도  

  

1)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날에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우리에게 도전과 찔림이 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가려고 합니다. 후렴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꿈이 뭘까요? 부자가 되고 권세를 갖게 되고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걸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 하나님의 꿈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르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가겠습니다. 

2) 어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강사님을 통해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귀한 종을 통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반복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우신 강사님들을 통해서 동일한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지금 주시고자 원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 말씀이라는 걸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어제 그분도 청량리역에 가셨고 또 서울역도 가셨고, 오늘 우리 목사님도 동일하게 청량리역, 서울역에 가셨잖아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많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죠. 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감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들 주변에 보게 되면 더 많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암과 투병 중에 있는 사람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외로움과 고독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 지극히 작은 자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해야 되고, 하나님이 내 곁에 주신 지극히 작은 자, 그들을 주께 대하듯 대해야 되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 ‘여기 내 형제’라는 말이 더 와닿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청량리역에 가야만, 서울역에 가야만 지극히 작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내 형제 중, ‘여기’라는 말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눈을 들어보게 되면,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 목사님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와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중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감정이 메말라버린 분들 있잖아요? 눈물도 웃음도 잃어버린 자들, 그런데 주님을 만나면 울보가 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영적인 희열이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금번 다니엘기도회 기간에 꼭 주님을 만나서 정말 영적인 치유를 경험하고 또 주님의 사랑으로 인한 감격의 눈물이 회복되어서 좀 울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신 말씀 붙들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나도 지극히 작은 자를 주께 대하듯 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가 되겠습니다. 은혜만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은혜받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말씀 앞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로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성령님, 금번 기도회 기간에 그 십자가 사건이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에 관하여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하여, 주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얼마나 영적인 희열이 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잃어버린 첫사랑도 회복하여 주시고,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늘 말씀을 듣고 결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이어지게 도와주셔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로 다가가게 도와주시고, 그 지극히 작은 자를 만나 기도하고 사랑을 흘려보내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래서 정말 우리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