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9 - 한주간의 말씀 요약 - 씀리뷰 55회 https://youtu.be/4F1OLn2UisM
죽음보다 더 확실한 부활 고린도후서 5:1~5
땅에 있는 장막집
사도 바울은 죽음을 땅의 장막 집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1절). 그러면 땅에 있는 장막집은 무엇을 말합니까? 건물로서의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육신 곧 몸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몸을 장막집으로 표현했을까요? 첫째,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몸이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장막이라는 단어의 뜻은 '덮다'라는 뜻을 가진 텐트, 곧 천막을 말합니다. 텐트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시적입니다. 텐트는 영원히 거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거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장막집인 우리의 몸은 철근과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건물과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합니다. 텐트는 비바람이 불면 심하게 흔들리고 심한 폭풍이라도 몰아치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립니다. 홍수를 만나거나 산사태를 만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천막과 같이 일시적이고 나약합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에서의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천막을 걷는 것, 해체하는 것으로 죽음을 말합니다. 천막을 철거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그렇습니다. 땅에서의 우리의 몸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반드시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반드시 죽는 날이 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그런데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1절). 그러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무엇을 말할까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입게 될 새로운 몸, 곧 부활체를 말합니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곧 육체가 죽게 되면 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영혼이 육체의 장막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는 썩어 한 줌의 흙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내 육체가 부활하게 됩니다. 어떻게 부활합니까?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고전15:42-44). 이렇게 우리의 몸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여 구원받은 영과 함께 온전하고도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손으로 지은 땅의 장막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하고 안정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라
2절부터는 죽음 이후 우리 부활의 몸을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는 공간으로서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우리 몸의 부활체를 말합니다. 즉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덧입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덧입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부활할 때에 원래 우리의 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멸절입니까? 아니면 수면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8절). 그러니까 내 영은 죽음 이후 잠을 자는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탄식하며 기다림
그런데 그러기 전까지 우리의 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탄식'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2절,4절). '탄식하다'는 말은 신음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음하다는 말의 단어가 바로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하여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탄식하고 있습니까?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고 연약한 우리의 몸입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한숨과 탄식 속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만이 아니라 부활의 신앙을 가진 우리 역시 무거운 짐을 진 자처럼 매일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생명에 의해 삼켜지는 죽음
이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생명에 의해 삼킨 바 되는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하려 함이라" (4절) 이 세상에 죽음처럼 잔인하고 무섭고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두려움이 있지만 죽음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우리 가운데 왕노릇하게 되었다(롬5:17)라고 말합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는 말은 사망이 왕처럼 군림하여 다스렸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이 죽음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권세 앞에서 돈 있는 자도 가난한 자도 무릎을 꿇었습니다. 백발의 노인도 젊은 청년도 이 사망의 권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망이 생명에 의해 삼킨 바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에 의해 이 사망이 삼킨 바 된 것입니다. "삼킨바 되다"라는 말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당하였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 표현하였습니다.
죽음보다 더 확실한 부활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출생보다 더 분명한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수 있었던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출생보다 더 분명하고 더 확실합니다. 그런데 저는 죽음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망이 생명에 삼킨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5절) 그러면 이 성령이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영이십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십니다(롬8:11절) 지금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을 확신하며 이 땅을 살았던 성도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히 11장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부활의 신앙을 확신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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