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한 주간의 말씀 요약
■ 아덴에 도착한 바울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친하를 이지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시기하던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은 베뢰아까지 바울을 잡기 위해쫓아왔습니다. 이에 바울은 홀로 배를 타고 아덴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배를 타고 320km를 가야 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남아있던 신라와 디모데는 마지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과 함께 아덴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아민은 BC 5세기 이후로 문명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서구 문명 정신세계의 기초를 놓았던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세상을 정복했지만, 철학과 사상은 그리스가 정복했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기 4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이 도시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아테네는 서양의 정치사상과 철학·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도시였습니다. 또한, 아테네는 도시 전체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단과 같았습니다. 도시 인구가 약 2만 명이었는데, 우상의 수는 그보다 많은 3만개 가량 되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홀로 이곳에 도착한 것입니다.
■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바울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행17:16) 아덴은 미학적으로 멋지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이 도시는 타락한 문화의 도시이자 퇴폐적이고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본문의 "우상이 가득한 것'은 '우상 밑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도시는 우상 밑에 깔려있는 도시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창조성'을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이들은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닌 우상숭배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격분합니다. 본문의 "격분하다"는 의미는 "발작을 일으키다"라는 의학 용어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 단어와 같습니다. 지금 바울은 문화적, 철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도시에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관점과는 다른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도시에 서 있었습니다. 격분한 바울은 회당과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홀로 복음을 전하던 중, 그 도시의 양대 산맥이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행17:18). 바울이 전하는 내용은 그들의 철학과 달랐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예수와 부활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끌고 갑니다. 아레오바고는 당시 최고법정으로서, 높이 115미터의 큰 바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서서 자신을 기소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을 상대로 논리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철학자인 그들의 수준에 맞게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3가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1. 첫 번째 질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모든 철학의 시작은 우주의 기원입니다. 이는 첫 번째 질문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답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사람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스토아 학파는 '신적 이성'인 로고스에 의해 세상의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성적 사고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성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이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을 향해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1)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행17:25).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우리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면 그저 인생을 즐기다 마치고 말 것입니다. 스토아학파치림 로고스가 질서를 정한다고 생각한다면, 운명론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연이나 운명론이 아닌 사명과 비전을 심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2. 두 번째 질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신은 믿었지만 무능력한 신 또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신을 믿었습니다.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감정을 통제하고 삶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 내적 평안을 누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인류의 모든 삶에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17:26) 하나님은 연대와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연대'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모든 나라들의 역사적 시점과 때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계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각 나라의 영토뿐만 아니라 삶의 지경까지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존재도 아니고 무의미한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으로 힘입어 살고 하나님으로 기동하며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17:28)
3. 세 번째 질문: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이 세 번째 질문에 대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은 '의식의 소멸'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아학파는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말합니다. 운명론적으로 죽음의 순간에 죽음에 순응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본문의 '정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우리를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에 따라 천국행 또는 지옥행이 결정됩니다. 심판주가 있다는 사실은 심판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 성경의 답을 따른 명확한 인생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연이나 쾌락이 아닌 하나님을 힘입이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성경의 답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눈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성경의 명확한 답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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