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다니엘 기도회 간증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9) - 유은성 전도사, 김정화 사모(11월 16일)

smile 주 2024. 2. 1. 10:30

 

□ 24년째 찬양 사역을 하고 있는, 배우 김정화의 남편 유은성입니다. 

  

― (유은성 전도사) : 안녕하세요? 저는 찬양사역자라고 하기도 하고, CCM 가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은’, ‘주 예수의 나의 손을 포개고’, ‘나는 믿네.’ 이런 찬양을 불렀고, 24년 동안 찬양 사역을 했습니다. 제가 23년 4월, 5월 SBS 동상이몽에 나간 이후로는 김정화의 남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시간 동안 혼자 노래만 하면 어쩌나 하는 표정들이 쭉 보여서, 제가 거두절미하고 제 아내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 제 아내가 17살 때 명동을 걸어가는데 누가 명함을 주면서, “자네 모델 할 생각 없나?” 했답니다. 제 아내가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겼습니다. 아내가 그 명함을 받고 집에 와서 부모님께 “이거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부모님이 경험 삼아서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그냥 경험 삼아 모델을 시작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여자분들이 잘 아시는 유명한 잡지에 실리게 됐고, 그 당시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을 찾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가수 이승환 씨가 이 잡지를 보다가 아내를 뮤직비디오의 여주인공으로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에이전트에 여쭤봤고, 제 아내가 ‘그대가 그대를’의 뮤직비디오에 여주인공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뮤직비디오를 본 MBC의 한 PD님이 시트콤 ‘논스톱’에 섭외한 것입니다. 그때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이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 시트콤에는 신인들만 나왔었는데, 그때 신인들로 나오셨던 분들이 지금은 아주 유명한 배우들이 되셨어요. 그때 출연하셨던 분이 조인성, 장나라, 장근석, 하하, 양동근, 박경림, 아내 김정화입니다. 아내가 그 시트콤에 나가고 나서 소위 말하는 스타가 되었답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랑해 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이후로 드라마도 많이 찍었어요. 백설공주, 바람의 나라, 어른들 좋아하시는 광개토대왕, 최근에는 스토브리그, 정말 많은 드라마를 찍고, 영화에도 많이 나오고, CF 광고로 삼성노트북, 설레임, 농협 등을 찍었습니다. 10대에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요? 얼마나 영향력이 많이 있었겠어요? 10대 때 유명해지는 게 저는 되게 부럽더라고요. 저는 그렇지 못했거든요. 찬양 사역을 24년 했지만, 그중에 7년은 무명 생활을 했거든요. 저 같은 사람에게 김정화 씨 같은 사람은 굉장히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 나중에 결혼을 하고 저는 우연히, 제 아내의 예전 일기장을 발견하게 됐어요. 서재에서 아내가 없을 때, 살짝 보게 됐어요. 과거가 궁금해서 본 건 아니에요.^^ 어떤 페이지에 갔더니, ‘우울하다’에 동그라미가 되어 있고, 다른 날 페이지에 갔더니, ‘죽고 싶다’에 밑줄이 쳐져 있고, 별 표시도 되어 있더라고요. 제가 좀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니까요. 다 가진 것 같았던 제 아내가 왜 그렇게 잘 나갈 때, 가진 거 많았을 때 죽고 싶었는지 아내한테 물어봤더니, 심지어는 우울증 약도 먹고, 병원도 다녔었고, 심한 생각까지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들을 오늘 전해드리면 어떨까 해서, 박수 한 번 주시면 김정화 씨를 이 자리에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10대에 연예계에 들어가 많은 인기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 (김정화 사모)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정화입니다. 사실 저는 성격이 굉장히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말로 하면 A형, 요즘 말로 하면 I형, 딱 그런 성격의 사람이어서, 제 주변에서 제가 연예인이 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저희 가족들도 정화가 연예인을 한다고 신기해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데뷔를 하게 됐고, 데뷔를 하자마자 잘 된 케이스였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행운이었던 거죠. 처음에는 경험 삼아 해보라고 하셨기 때문에, 직업으로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너무나 쟁쟁한 연예인들 사이에 제가 있는 게 부끄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사실 잘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그리고 좀 못생겼다고 생각하면서 활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점 활동이 많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영화도 찍게 되고, MC도 보게 되고, DJ도 하게 되고, 드라마도 하게 되고, 광고도 찍게 되고, 활동이 점점 바빠지게 되니까, 집에 거의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바쁘게 활동할 때는 거의 일주일에 한 이틀 정도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잠도 하루에 2~3시간 자는 것이 많이 자는 거였어요. 항상 이동하는 중간에 쪽잠 자는 게 전부였었거든요.  

  

□ 영적 침체와 우울증에 빠져 연예계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 (김정화 사모) : 그렇게 막 활동을 바쁘게 하다 보니까 학교는 당연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어요. 10대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기에 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뭔가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는데, 부모님이 이혼을 하시게 되면서 상처가 되게 컸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도 나를 버리는구나’라는 생각이 좀 있었습니다. 

― (유은성 전도사) :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된 이유가 조금 있습니다. 저희 장인어른이 이북에서 오신 가정이세요. 장인어른이 3대 독자셨고요. 아버님이 결혼하셔서, 제 아내랑 언니 그렇게 딸만 둘 낳으셨어요. 그러니까 시어머니는 조금 안타까우신 거죠?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셨는데, 저희 장모님이 예수님을 믿으신 거예요. 신기하게도 누가 전도해서 예수님을 믿으신 게 아니라 그냥 ‘이 아름다운 세상 누가 만들었을까? 하늘도 예쁘고 꽃도 예쁘고 너무 아름다운데 이걸 누가 만들었을까?’ 고민하실 때 성경책을 보게 됐는데,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시고, 이게 그냥 믿어지셨대요. 너무 신기하죠? 그게 믿어지셔서, 딸들을 모태 신앙으로 키우신 겁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제사 지내는 가정에 며느리가 한 명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데다, 딸만 둘 낳고 마니까,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조금 마음이 안 좋으신 부분이 있어서, 사실은 시집살이를 좀 고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은 이혼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 (김정화 사모) : 저는 모태 신앙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늘 있었고,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교회에 있는 게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옛날에는 저녁 예배가 있어서 어른들하고 같이 예배드리잖아요. 우리는 어린이 예배만 드리고 오면 되는데, 어른들과 함께 저녁 예배드리고, 저녁 예배 끝나고 성가대 연습을 하게 되면, 저는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목사님 댁에 가서 놀면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친구도 만나러 가는 곳이었고, 맛있는 거도 먹고, 예배도 재밌게 드리고, 사택 가서 목사님 딸인 언니랑 놀기도 하고, 약간 교회가 놀이터 같은 곳이어서 주일날 하루종일 교회에 있는 걸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 중에 하나인데, 데뷔를 하고 나니까 주일에 교회 갈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 제가 생방송 ‘SBS 인기가요’라는 프로그램을 굉장히 오래 진행을 했었는데, 주일에는 항상 그 촬영장에 있어야 했고, 수요일, 금요일 철야 때도 마찬가지어서, 항상 교회 갈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당시 저의 신앙생활의 전부는 자기 전에 잠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전부였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제가 가장 많이 했던 기도가 ‘하나님, 왜 나를 연예인으로 만드셨어요? 난 한 번도 하나님한테 연예인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적도 없었고, 난 잘난 것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인데, 왜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 저였어요? 저 내일 중요한 촬영 있는데 너무 힘들어요. 가기 싫어요. 저 그냥 안 갔으면 좋겠어요. 저 오늘 눈 감으면 내일 눈 안 떴으면 좋겠어요.’ 이런 기도를 굉장히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예배를 드리러 갈 시간도 없었고, 영적인 공급이 아무래도 끊어진 상태여서 그런지 항상 불평, 불만의 생각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한 3년, 4년, 5년 정도는 정말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렇게 활동을 계속하다가는 좀 안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구나?’ 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 ‘가면성 우울증’이라는 걸 좀 심각하게 앓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몰래 정신과 치료도 받았었고, 지금은 좀 자연스러운데, 옛날에 연예인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하면 굉장히 큰 이슈여서, 쉬쉬하면서 정신과 약도 복용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나아지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에 얘기를 하게 된 거죠. “저, 이제 좀 쉼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과감하게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 활동을 중단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진짜 나만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김정화 사모) : 제가 활동을 중단하고 가장 먼저 했던 게 성경 공부였어요. 말씀이 너무 궁금했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정말 궁금했어요. 그래서 성경 공부를 쭉 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정말 제가 성경 공부하면서 성경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책인 걸, 그때 처음 깨달은 거예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말씀이 달고, 오묘하다는 찬송가 가사가 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가 좀 부끄러운 거예요. 제가 20대 중반까지 평생 교회에서 목사님이 이야기해 주시는 그 성경 구절 외에는 제가 성경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성경을 통독하면서 저만의 하나님을 처음 만난 것 같아요. 어머니의 신앙으로 교회를 다녔던 거지, 진짜 나만의 하나님을 그때 제가 처음 만나게 된 것입니다.  

― 그때 너무 말씀 배우는 게 즐거워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탤런트 정태우 씨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화야, MBC에서 하는 프로그램인데,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에 걸린 한 여자아이를 만나서 그 아이랑 오랫동안 관계를 갖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한 번 가볼래?’ 하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마침 활동을 쉬고 있는 중이었고, 가보고 싶어서, “오빠, 저 갈래요.” 하고, 아이에 대한 내용을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 고아가 된 아프리카 아이의 엄마가 되어주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습니다.   

  

―  (김정화 사모) : 제가 만났던 아이는 6살 ‘아그네스’라는 아이인데, 그때가 2009년도였어요. 그때 당시 그 아이는 3살 때 에이즈로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시고, 본인도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이모에게 발견이 되어 이모네 집에 얹혀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모 집은 어떤 집이냐면, 이모 이모부가 다 에이즈에 걸려 계세요. 심지어 이모부는 중증 에이즈 환자였어요. 이모 이모부 사이에 7명의 아이가 있는데, 7명의 아이들 다 에이즈에 걸려 있었어요. 그런 집에 여덟 번째로 얹혀 살고 있는 아이였었어요. 제가 아이의 정보를 받고 열심히 기도했던 것 같아요. 아이를 만날 때 딱 한 가지만 기도했어요. ‘이 아이가 저를 그냥 받아줄 수만 있게 해주세요. 마음만 열어주게 해주세요.’ 왜냐하면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누군가가 와서 ‘앞으로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줄게.’라고 했을 때, ‘과연 이 아이가 나에게 마음을 열어줄까?’ 저는 좀 약간 어색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거 하나만을 기도하고 제가 아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거의 한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8시간 넘게 차를 타고, 이 아이를 만나러 갔어요. 한국에서 이 아이에게 주려고, 옷이랑 신발, 필기도구, 연필 이런 걸 사가지고, 제가 잔뜩 선물을 들고 이 아이를 만나러 걸어가고 있었어요. 이 아이도 한국에서 누군가 너를 만나러 올 거라는 이야기를 선교사님한테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차 소리가 들리니까 ‘그분이 오셨나 보다.’ 하고 이 아이가 문에서 뛰어나오기 시작했어요. 저 멀리서 정말 작고 왜소하고 조그마한 아이인데 다 찢어진 옷에 신발도 신고 있지 않은 너무나 왜소한 아이가 저를 향해 막 달려오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A형 소심한 성격이어서, ‘내가 아이를 안아도 되나? 만나면 어떻게 하지? 머리를 쓰다듬어도 되나?’ 약간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제가 멈칫멈칫하고 있는데, 아이가 막 저를 향해 달려오더니 먼저 저를 와락 안아주는 거예요. 그때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나, 왜 눈물 나지? 왜 이상하다. 나, 마음이 왜 이러지?’ 이런 마음이었었거든요. 근데 사실 아이가 저를 먼저 안아주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제가 이 아이를 만지는 거, 손을 잡는 거, 제가 이 아이를 항상 이렇게 안고 다녔어요. 안기에 너무 가벼웠고, 볼에 뽀뽀하는 게 너무나 편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제가 아이랑 한 4일 정도를 같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되어주러 간 거니까, ‘엄마가 할 수 있는 모든 건 다 해주고 오자.’는 마음이었습니다. 학부모로서 학교에 참관 수업도 가보고, 병원도 데리고 가고, 시장에 데리고 가서 옷도 사 입히고, 심지어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 아이 속옷도 입혀주고 신발도 신겨주고, 빨래도 해주고, 밥 만들어서 같이 밥도 먹여주고, 많은 것들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아이랑 한 4일 동안 있으면서, 마지막 날, 제가 이 아이를 보는 데 좀 신기한 거예요. 제가 첫날 이 아이를 만났을 때는 되게 소극적이었거든요.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은 에이즈에 걸렸다는 이유로 학교에 가면 왕따를 당하기도 했구요, 동네에서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해요. 그래서 자신감 있게 살아가지 못하는데, 이 아그네스도 그런 아이였었어요. 제가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대답했던 아이였거든요. 마지막 날에는 통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아이가 말이 많아졌고, ‘엄마, 내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 가르쳐줄까?’ 이러면서 제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실 아그네스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냥 옆에 있어 줬고, ‘앞으로 내가 너희 엄마가 되어 줄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위해 기도할 거야.’라는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이 아이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니까 그게 너무 놀라웠습니다.  

― 그런데 그렇게 밝아졌던 아이가 마지막 날, “이제 엄마, 한국 가야 돼.” 하면서 제가 막 오열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사실 저는 씩씩하게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앞으로 저는 이 아이의 엄마가 될 거고, 나는 이 아이를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보러 올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엄마 가야 돼.’ 하는데, 진짜 제 혈육을 놓고 오는 것 같이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막 울고 있으니까, 아그네스가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통역으로 이제 엄마가 한국에 간다는 얘기를 듣더니, 갑자기 첫날의 소극적이었던 모습으로 돌아간 거예요. 얘가 갑자기 제 옆에서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그네스,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 제가 이렇게 물어봤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떤 말이라도 듣고 가고 싶은 거예요. ‘보고 싶을 거야.’라든지, ‘엄마, 즐거웠어요.’라든지, 이런 말을 듣고 가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아그네스, 엄마한테 할 말 없어?, 진짜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 이렇게 물어봤는데, 제가 한 2시간 동안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냥 눈물만 흘리고 저한테 정말 아무 얘기를 안 했어요. 저는 숙소로 돌아왔고, 거기 계신 현직 선교사님께서 아그네스한테 “아그네스, 왜 엄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렇게 물어봤더니, 아그네스가 “엄마 내일 아침에 진짜 안 와요?” 이렇게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엄마, 내일 아침에 못 와. 한국은 먼 곳이야, 왜 엄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 6살짜리 조그마한 아이 입에서 하는 얘기가 “그럼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나중에 엄마가 나를 보러 왔는데 내가 죽고 없으면 어떡해요?”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나중에 선교사님한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그전에도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했었거든요. 그 아이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피부색이 어떻든, 온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 사랑받아 마땅하고, 터무니없는 꿈이라도 꿔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6살짜리 조그마한 아이 입에서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게, 저한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기도와 감사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  (김정화 사모) :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에 와서 제 평생에 처음으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그네스를 위해서, 아그네스와 같은 또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아프리카 땅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게도 저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저한테 너무나 큰 은혜를 주시더라고요. 제가 돌아와서 생각해 봤어요. 사실 제가 아그네스를 만나러 갈 때, 제가 무언가를 주러 간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고아가 된 아이의 엄마가 되어주고, 헐벗은 아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옆에 있어 주고, 책을 선물해주고. 그런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제가 아그네스한테 받은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첫 만남 때 저를 안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아그네스에게 편하게 대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저를 엄마로 받아주지 않았다면, 정말 제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내가 아프리카 그 땅에 태어나지 않고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얼마나 감사한 건지,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은혜인지, 아침에 일어나서 불을 켰는데 불이 들어오고, 물을 틀었는데 그냥 물이 아니라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제가 아그네스를 만나고 나서 깨달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모든 제 삶에 감사가 넘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그네스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제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그네스를 만나고 나서 제 마음이 달라지니까, 내가 오늘 하루 숨 쉴 수 있는 게 감사한 거구나.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 감사한 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를 연예인으로 만드셨는지 깨달았습니다. 아그네스를 만나고 나니까, 어려운 아이들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하나님이 그 수많은 사람 중에 굳이 나를 들어서 유명해지게 만드신 거는 이런 아이들을 세상에 더 알리라고, 더 많은 곳에 전하라고 나를 연예인으로 만드셨구나. 그렇다면 내가 배우로 활동하는 것도 정말 열심히 해야 되는구나. 더 좋은 배우가 되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나니까 삶의 목적이 생기고 비전이 생기니까,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아그네스 때문에 사실은 제가 받은 게 너무나 많았습니다.   

  

□ 저희가 만나서 교제하게 된 이유에는 돌아가신 장모님이 계셨습니다.  

  

― (유은성 전도사) : 장모님이 어머니가 이혼하고 암에 걸리셨어요. 스트레스가 많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암에 걸리고 암 투병을 하시게 됐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돌아가시게 됐어요. 아내가 아픈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의 상황이, 아픈 엄마의 딸이고, 또 에이즈 걸린 아그네스라는 딸의 엄마이고 딱 중간의 위치에 있게 되니까,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판매되는 모든 수익은 에이즈센터 짓는 데 기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동시에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있었는데, 그 책에 QR 코드를 찍어서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저한테 작곡 의뢰가 온 겁니다. 그래서 제가 곡을 쓰고, 아내가 작사를 하고, 음원을 만들고,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해서, 음악을 프로듀싱 하면서 저희가 만나게 됐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책과 음원을 모두 발표해기 위해 서둘렀고, 음악은 빨리 작업했는데, 책의 편집이 늦게 되는 바람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사실 그 책을 쓰고 그 음반 작업을 할 때까지는 저희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어요. 김정화 씨는 저에게 너무 멀리 있는 연예인이었어요. 저는 그냥 찬양 사역을 오래 해서, 기독교인들이 제 찬양은 조금 사랑해 주시고 알아주셨지만, 연예인 김정화는 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저희가 대화할 일이 있어도 매니저를 통해서 대화했습니다. 

― 작업이 다 끝나고 처음으로 정화 씨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 가셔야 될 수도 있다고 해서, 전도사로서 병원에 가서 처음 어머니께 기도를 해 드리게 됐습니다. 그날은 어머님이 갑자기 나빠지시기 마지막 전날이었어요. 입원실에 갔는데, 안경을 달라고 하시더니 안경을 쓰시면서 앉으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를 이렇게 보시더라고요. 기도해 드리고 어머니랑 잠시 말씀을 나누고 나왔습니다. 나중에 저희가 결혼하고 들은 얘기인데, 어머니가 의식을 잃으시고 그 다음 날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셨는데 의식 있기 전 마지막 날, 같이 계시던 이모님한테, ‘우리 정화는 저런 남자랑 결혼하면 좋을 것 같아.’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 어머니가 의식을 잃으시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셨는데, 호스피스 병동이 강남성모병원이었어요. 제가 총신대 대학원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고 있었고, 저희 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매일 병원에 가서 잠깐씩 기도해 드리러 한 일주일 정도 갔는데, 어느 날 정화 씨를 보는데, 의식이 없는 엄마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 드리면서, ‘엄마 너무 예뻐.’하는 겁니다. 어머님 얼굴색이 검게 변하셔서 화장품을 발라드린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엄마 너무 예뻐. 괜찮아, 엄마.’ 하는데,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정화 씨가 너무 가여워 보이는 거예요. 저희가 7살 차이 나거든요. 그때 제가 속으로 하나님께 뭐라 그랬냐면, ‘하나님, 저 저런 사람이면 참 좋을 것 같아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찬양 사역만 쭉 하느라고 결혼을 뒤로 계속 미루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정화 씨가 되게 화려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아무것도 안 먹고 굶으면서 계속 엄마를 케어하니까, ‘내가 이 사람을 챙겨야겠다.’ 해서 먹을 거 사가지고 병문 앞에다가 놓고 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저한테 제일 먼저 연락을 줬다 하더라고요. 제가 먼저 달려갔어야 되는데 그렇게 못했어요. 왜냐하면 연예인이잖아요. 제가 제일 먼저 가면 기자들도 있으실 거고, 기획사 관계자분들도 있을 텐데, ‘저 사람 누군데, 제일 먼저 와 있지?’ 할 것 같아서, 오후 늦게 천천히 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둘 다 기아대책 NGO 홍보대사였었는데, 기아대책 홍보대사들이 장례식 간다 해서 둘째 날도 가고, 마지막 날 장지로 갈 때는 제가 안 갔어요. 왜냐하면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요. 저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는데, 제가 그렇게 가면 혹시 이 사람한테 피해가 될까 봐 안 갔어요. 안 갔는데 거기서 김정화 씨가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끝나고 저한테 장문의 카톡을 보낸 겁니다. ‘그 동안 제가 전도사님께 너무 많이 의지하고, 전도사님께 너무 많이 기댄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혼자 홀로서기를 할게요.’ 누가 봐도 이제 앞으로 연락 안 하겠다는 거예요. 누가 봐도 ‘너, 장례식 마지막 날도 안 왔어? 나 이제 연락 안 할 거야. 연락 나한테 하지 마.’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나한테 기대고 의지한 것, 후회해요?’라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한참 있다가 답장이 왔는데, 후회 안 한다고 왔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계속 기대요. 내가 엄마가 될 수는 없지만, 엄마처럼 옆에 있을 때니까, 힘들 때는 얼마든지 기대고 의지했으면 좋겠다. 나중에 좀 더 괜찮아지면 그때 혼자 갈 수 있게 할게요.’라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만나서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닌 거 알겠지만, 교제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도사님은 결혼할 사람 만나셔야 된다.’고 하면서 자꾸 빼길래, ‘저 결혼 생각 전혀 없다고, 제가 옆에 있어 주고 언제든지 혼자 가고 싶을 때는 보내드릴게요.’ 그랬더니 허락했어요. 그래서 교제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 결혼은 하나님이 개입해 주신 한 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 (유은성 전도사) : 교제를 하다가 제가 한 달 만에, “내가 진짜 미안한데,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 같은데, 우리 결혼합시다.” 그랬어요. 반지를 준 것도 아니고, 같이 데이트하면서, 밥을 먹고 막 반찬을 막 챙겨주면서, “이렇게 반찬 챙겨주는 남자 없어요, 나랑 결혼해요.” 차문을 막 열어주면서, “이렇게 차 문 열어주는 매너 있는 남자 없어요, 나랑 결혼해요.”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실래요? 결혼할래요?” 3개월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한 번은 추석 명절이라 전화해서 “추석인데 뭐 해요?” 했더니, 혼자 있다는 겁니다. 장인어른이 자녀들 다 키우시고, 나중에 새로운 가정이 생기셔서 안 계셨구요. 언니는 일본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때라서 혼자였던 겁니다. ‘추석에 왜 혼자 있지? 추석은 그런 기간이 아닌데.’ 그래서 제가 ‘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가족이 이 사람의 가족이 되면 한꺼번에 엄마 아빠도 생기고 언니들도 생기고 남편도 생기고 너무 좋겠다.’ 해서 적극적으로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목사님이세요. 저는 아주 보수적인 교단에서 자랐고, 개척교회 집 막내아들입니다. 누나 둘이 있습니다. 참 결혼 조건이 좋죠?^^ 우리 가족이 정화 씨의 가족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결혼하자고 말하고, 3개월 동안 제가 다니엘의 기도를 했습니다. 9시, 12시, 3시, 6시 알람을 맞추고 3개월 동안 매일매일 알람이 어느 곳에서 울리든 어느 곳에 제가 있든 기도하는 거예요.방향을 정해놓고 세 가지 놓고 기도했어요. 첫째는 정화 씨 마음을 위해서, 둘째는 장인어른과 새로운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세 번째는 기획사 대표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20대 후반의 여배우와 결혼한다고 하면 어떤 기획사 대표님이 허락하겠어요. 아버님은 예수님 안 믿으시는데 저를 찬성하실 이유가 없으세요. 이미 많은 선 자리가 왔었을 것 같구요. 그래서 세 가지를 놓고 기도했는데, 먼저 정화 씨가 마음을 열어줬고요. 두 번째는 기획사 대표님이 참 훌륭하세요. 정화 씨 어릴 때부터 언니처럼 지내던 분이 대표님이셨는데, ‘여배우의 인생보다 여자의 인생이 우선이다. 결혼해라.’ 하시고 크리스천 아니신데, 교회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먼저 말씀해 주셨고, 이제 아버님을 설득해야 할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있어도 그렇게 떠는 성격이 아닌데, 제가 아버님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지, 아버님 뵙기 전에 너무 떨었습니다. 우리 교제하는 거 정식으로 아버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날을 잡고 새어머님이랑 나오시기로 하셨는데, 전날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잤어요. 아버님이 저에게 질문하실 예상 질문 15개를 만들어서 외우기도 했습니다. 만나는 자리에서 아버님이 질문을 하시는데, 예상 질문이 아닌 것을 하시는 바람에 제가 머리가 하얘지면서 횡설수설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답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2시간 동안 식사하고 숟가락을 놓으시면서, 아버님이 “자네는 내가 무슨 질문하면 횡설수설하고 순수해서 참 보기 좋아.” 그리고 “자네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라 했나?” 하시더니, “난 자네 아버지가 목사님이셔서 자네가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겁니다. “제가 마음에 드신다고요? 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자네, 우리 정화를 자네 부모님한테 언제 인사시킬 건가?” 다음 주 목요일쯤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러면 그날을 상견례로 잡아. 우리 정화랑 결혼하게.” 아니, 저희 정식으로 교제하겠다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또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우리 정화, 정말 많은 선이 오고 그랬는데, 다 거절했어. 정화가 인사시킨 남자는 자네가 처음이야. 그런 정화가 선택한 남자라면 나도 믿어.” 하시는 겁니다. 아버님에 대한 저의 기도가 응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그래서 너무 기뻐서, 저희 아버지에게 전화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는데, 부모님에게 교제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거든요. 불과 두 달 전 1월 신정 설날 때에도 만나는 사람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해서 상견례 날짜로 전화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 다음 주 목요일에, 어느 호텔로 저녁 7시까지 어머니랑 예쁘게 잘 차려입고 나오세요. 그날 상견례입니다.” 그러고 그냥 끊어버렸어요.  

― 상견례 날짜가 돼서, 상견례에 부모님이 나오셨는데, 제 아내를 그날 정식으로 처음 보신 거예요. 문제는 뭐였냐면 저희 아버지께서 그때 드라마 ‘광개토대왕’을 굉장히 즐겨보고 계셨어요. 제 아내가 광개토대왕에서 ‘설지’ 역할을 하고 있었거든요. 상견례 때, 결혼할 여자라고 인사한 아내를 보고, 아버지께서 ‘설지’가 이 자리에 나왔다고,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너무 좋으신 나머지, 상견례 때 갑자기 설교를 하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모세가 신의 산에서...” 제가 ‘아버지, 죄송한데 식사하시죠?’ 해서 식사했다가, 아무 할 얘기 없으니까, “법궤가 이스라엘에 들어왔는데” 하면서 다시 설교하시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예수님 안 믿으시고, 하나님 모르시는데, ‘아멘, 아멘’ 하고 계시고, 아버지는 틈만 나면 계속 설교를 하셨습니다. 3시간이 지나 상견례 끝나고, 제가 장인어른께, “진짜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원로 목사님 되신 지 얼마 안 되셔서 너무 설교하고 싶으셨나 봐요. 상견례에서 이렇게 설교하셔서 너무 죄송해요.” 그랬더니, 아버님이 “아냐 아냐, 나 이렇게 은혜로운 상견례 처음이야. 우리 사돈어른이 목사님이시고 사위가 전도사인데, 나도 이제 예수 믿어야지.” 하시는 겁니다. 사실 장인어른은 이전 상견례에서 안 좋은 경험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저희 장인어른과 결혼하신 새어머니에게 자녀가 둘이 있어요. 그 둘이 먼저 결혼을 했는데, 그때 상견례에 장인어른이 같이 나가면서 상견례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기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혼수, 예물, 예단 이런 얘기하면서 상처가 있고 다툼이 좀 있었던 거예요. 두 번 다요. 그래서 상견례에 대해 별로 좋지 않으신 기억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런데 저희는 “결혼하면, 저희 둘이 알아서 예쁘게 잘 살 테니까, 두 가정 모두 그냥 축복해 주세요.”라고 했기 때문에, 상견례 때 싸울 이야기도 없었고, 너무 좋으셨던 것입니다.  

― (김정화 사모) : 아빠는 저의 평생 기도 제목이었어요, 엄마는 신앙이 좋으셨고, 언니랑 저를 항상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는데, 어릴 때 저희 셋이 교회에 가면 항상 핍박하던 아빠의 모습이 기억나거든요. 어릴 때는 그냥 지나갔지만, 제가 커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 다 같이 천국 가야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빠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했었거든요. 그래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결혼하면서 그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 행복한 삶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유은성 전도사) : 저희 결혼을 통해서 장인어른 가정, 우리 아내 가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저희 장인어른, 장모님 지금 믿음 생활 너무 예쁘게 하세요. 예수님 믿으신 지 11년 되셨어요. 말씀 문자 보내주시고 어떨 때는 영상도 보내주시고, 교회에서 은혜로운 거 있으면 막 사진 찍어서 보내시고 검사받으세요. 저희한테 그게 너무 예쁘신 거예요. 그리고 요즘 성경책이 궁금하다 하시고요. 저희 아이들 둘이 있어요. 9살짜리 아들 하나, 또 7살짜리 아들 하나, 아들만 둘이에요. 근데 저희 아이들의 최대 관심사가 예수님이에요. 그리고 그 시집살이 시키셨던 정화 씨의 할머니가 94세이신데, 아직 살아계시고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이제 제 아내의 가정은 4대가 예수 믿는 가정이 됐어요. 저는 이거보다 큰 복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아내가 예전보다 더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제 더 활동하려고 영화도 찍고 있고, 여러 가지 작품들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전보다 사랑을 덜 받을 수도 있고, 돈을 조금 덜 벌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돈이 많다고, 영향력 있다고, 권력 있다고, 다 행복하지는 않더라고요. 행복을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더라고요.―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묵상하고 있는 말씀 중에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 믿으면 성공해야 되고, 예수 믿으면 잘 돼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희가 신앙생활 하면서 꼭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있잖아요. 저희에게도 그랬던 것 같아요. 늘 힘든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과 우리의 다른 점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느냐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 없이, 그 광야의 시간들을 걸어갈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뇌종양 환자이지만 감사가 흘러나왔고, 거기에 신의 한 수가 있었습니다.  

  

― (유은성 전도사) : 작년 9월에 건강진단 검사 후, 뇌종양이 의심된다고, 큰 병원에 가서 검사받으라고 해서, 인하대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똑같이 뇌종양이 의심되고, 일정이 밀려 있으니, 2개월 후에 3일간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하루는 아이가 아파서, 삼성병원 연계병원인 소아과의원에 가서 저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원장님이 크리스천이셨어요. “원장님, 기도해 주세요. 제가 뇌종양으로 어쩌면 수술을 해야 되고, 수술하면 사망할 확률이 살 확률보다 더 높대요. 만일 제가 수술이 잘 되어 살아나도, 장애로 오른쪽 귀는 못 들을 거라고 했고요. 기억을 못할 확률이 92%래요.”라고 했더니 이 원장님이 너무 충격을 받으셨어요. 원장님이 진료를 멈추시고 삼성병원에 전화하시고, 뇌종양 권위자 의사선생님을 수배해서 6일 후에 예약을 잡아주셨습니다. 아내와 함께 삼성병원에 검사받으러 가면서,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검사를 받고 2주 후에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집으로 오면서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습니다. 밤에 아내와 이이들을 재우고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너무 속상하고 울컥하는 겁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이랑 자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감사한 겁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내가 아픈 것이 너무 감사한 겁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아팠으면, 저는 견디지 못했을 것 같은 겁니다.  

― 2주 후에 결과를 보러 갔는데, 아내에게 내가 혹시 기억을 잃더라도 어떻게든 당신이랑 아이들을 기억해낼 테니,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특별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이상하게 하나님이 마음에 평안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평안하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실 거야.” 하면서 병원에 갔습니다. 

― 삼성병원에 진료 가기 전에, 2015년 미국의 작은 교회 사역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 당시 검진을 하면서, 머리 MRI 찍었는데, 뇌에 문제가 있다고 뇌신경과에 가서 다시 재검하라고 해서, 근처 뇌신경과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CCM가수인 저를 알아보시고 너무 반가워서 MRI 사진을 대충 보시고, 피곤하면 그럴 수 있다고, 문제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MRI 사진을 집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 다니면서 못 찾고 있다가, 병원 가기 하루 전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제출했습니다.   

― 삼성병원에 첫 진료를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2015년 MRI 사진, 작년 검진센터 MRI 사진, 그리고 23년 MRI을 보고 비교하고 계셨는데, 2015년에 이미 암세포가 있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때 당시 오진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8년 동안 암세포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변형되어 있는데도 자라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수술하지 말자고 하십니다. 암이 커지면 하자고 하십니다. 만일 수술하게 되면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암 환자 등급인 C코드를 받아 95% 진료비를 할인받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입니다.  

― 너무 감사해서 ‘나, 뇌종양인데, 아직 수술 안 받기로 했어요.’라고 진료 결과를 SNS에 올렸는데, 친구들이 많이 전화했습니다. 제 친구들은 대부분 목회자입니다. 한 친구가 바울도 제 몸의 가시를 위해 3번 기도했는데, 너도 너 자신을 위해 기도했냐고 묻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 잘 못 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성아, 그래도 이제 널 위해 기도해. 우리, 니 찬양 오래 듣고 싶다.”고 합니다. 

  

□ 하나님께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을 써달라고 기도하십시오. 

 

  

― (유은성 전도사) :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 여러분 아시잖아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첫 구절은 하나님이 내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고쳐주시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에 제가 무너졌어요. ‘이로 인해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제가 이 말씀 보고, ‘하나님, 드러내고 싶어요. 제 연약한 거 드러내놓고 자랑할게요. 하나님 사용해 주세요.’ 그 이후로 방송국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SBS ‘동상이몽’을 포함해서 각 방송국의 수많은 곳에서 저희 부부를 초청하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신문기사가 났는데, 제목이 ‘배우 김정화 남편 CCM가수 유은성, 뇌암’ 곧 죽을 것 같이 기사가 나왔습니다. 동상이몽에 2달간 나오면서, 공중파에서 허락되지 않는 크리스천 용어, 아이들 예배드리는 것, 시아준수가 찬양 부르는 것, 선교사님이랑 통화하는 것, 기도하는 모습 등 크리스천의 모든 삶이 리얼하게 나왔습니다. 제가 만나교회 다니는데요. 김병삼 목사님이 밤 프로라 못 보신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밤 12시에 전화하셨어요. 울먹이시면서, “유전도사, 내가 10편의 설교를 하는 것보다 방송에서 이렇게 하나님 드러내 주니까 훨씬 영향력 있다. 너무 고마워!” 하십니다. 제가 악플을 걱정하면서 댓글을 보았는데, SBS 보면서 CBS 보는 줄 알았다는 댓글 등 모두 격려하고 긍정적인 댓글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공중파를 들어서 일하시는 분인 걸 그때 알았습니다.  

― 예수님 안 믿으시는 분들,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살아계세요! 예수 믿으시는 분들, 잘 기억하세요. 저 시한부 인생, 맞아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제가 제 아내보다 7살 많은데 제 아내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어요. 저만 시한부 인생 아니구요,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러면 언제 죽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고계신 데, 여러분, 우리 이 땅에서 어떻게 사시겠어요? 저만 연약함 있나요? 여러분 다 있으시잖아요? 때로는 재정적으로, 때로는 관계적으로, 때로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마음적으로 연약한 거 다 있으시잖아요? 사도바울처럼 내 연약한 것, 당당하게 하나님께 내놓으시고, “하나님, 이것도 써주세요.” 하시면 하나님은 그것도 써주시는 분이시고, 사용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결어 및 기도  

  

1)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고, 나를 통해서 가정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죠. 그래서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말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주여 한 번 부르고 합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2) 하나님 아버지, 우리 유은성 전도사님과 김정화 사모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도전받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짐을 안겨주고, 힘들게 하고, 눈물을 쏟게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정말 축복의 통로가 되어 영혼을 살리고, 누군가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흘려보내고, 누군가의 가정에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고, 누군가에게 비전을 심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삶을 붙들어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