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김은호 설립목사 주일설교/2023년 주일 설교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에베소서 6장 23-24) 2023.06.11

smile 주 2023. 6. 19. 12:13

2023.06.11 한 주간의 말씀 요약 - 씀 리뷰 61회 https://youtu.be/GIWyYG_Gt9k

 

바울이 선포한 세 가지 축복

바울은 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성도들에게 세 가지 축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여 선포한 세 가지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 평안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김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3절)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평안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이고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이 평안은 불안이나 두려움이 없는 안정된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 인간 세계에 이런 불안과 두려움이 임하였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창3:10)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다음 가장 먼저 경험한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욥 22:21a)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축복하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3절)라고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도 고난을 만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인생의 고난을 만나고 풍랑을 만나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이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평안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요16:33) 왜냐하면 평안이 없는 축복은 그 어떤 것도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액의 연봉을 받고 좋은 환경 가운데 살지라도 그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돈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형제들을 축복하면서 가장 먼저 평안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둘째, 믿음을 겸한 사랑


또 사도 바울은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기를 축복했습니다.(23절)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축복하면서 사랑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동기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명을 잃어버리고 다시 이전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나아갔던 베드로를 찾아오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실추된 사도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맡기신 모든 일의 동기가 바로 사랑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 일의 동기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의 결과보다도 그 일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어떤 일을 얼마나 능률적으로 성취했느냐보다는 어떤 이유로 그것을 왜 하게 되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일에 모든 동기는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 지식이 있느냐?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냥 사랑이 아니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바탕을 둔 사랑이어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셋째, 은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축원하였습니다.(24) 그런데 사도 바울의 축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은혜는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함이 없이"라는 말입니다. 변함이 없다는 말은 주님을 사랑하되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도 달라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처음 사랑할 때와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영원한 사랑"(렘31:3b)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할만한 상황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기 최후의 만찬 석상에 앉아 있는 제자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떠나갈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자신을 은 삼십에 팔아넘길 가룟 유다도 너무나 태연하게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느 한 제자도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보면 병이 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 5:8) 누군가를 사랑하여 병이 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병이 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롬8:36-39)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무대 위의 배우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의 밤을 만나고 풍랑을 만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내게 허락하신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부모와 자녀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